Context of 이집트

이집트 아랍 공화국(아랍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 이집트 아랍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굼후리야트 마스르 알아라비야, 듣기 ), 줄여서 이집트(아랍어: مِصْر 미스르[*], 이집트 아랍어: مَصْر 마스르, 콥트어: Ⲭⲏⲙⲓ 키미, 문화어: 에짚트)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시나이반도에 결쳐 있는 국가이다. 영토 면적은 100만 1450 km2 수도는 카이로이다.

이집트는 그 어떠한 국가들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약 5,000여 년 전부터 나일강가에서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30세기에 이르자 고대 이집트 문명은 문자, 농업, 도시화, 종교, 정부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하여 압도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풍요로운 시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 기자의 피라미드와 대스핑크스가 세워졌으며, 멤피스, 테베, 카르나크, 왕가의 계곡 같은 위대한 유산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후 이집트 문명은 점차 쇠퇴를 거듭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로마인, 아랍인, 오스만인, 누비아인들이 연이어 이집트를 침투...더 보기

이집트 아랍 공화국(아랍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 이집트 아랍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굼후리야트 마스르 알아라비야, 듣기 ), 줄여서 이집트(아랍어: مِصْر 미스르[*], 이집트 아랍어: مَصْر 마스르, 콥트어: Ⲭⲏⲙⲓ 키미, 문화어: 에짚트)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시나이반도에 결쳐 있는 국가이다. 영토 면적은 100만 1450 km2 수도는 카이로이다.

이집트는 그 어떠한 국가들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약 5,000여 년 전부터 나일강가에서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30세기에 이르자 고대 이집트 문명은 문자, 농업, 도시화, 종교, 정부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하여 압도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풍요로운 시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 기자의 피라미드와 대스핑크스가 세워졌으며, 멤피스, 테베, 카르나크, 왕가의 계곡 같은 위대한 유산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후 이집트 문명은 점차 쇠퇴를 거듭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로마인, 아랍인, 오스만인, 누비아인들이 연이어 이집트를 침투하며 지배하였다. 이집트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으나,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며 점차 무슬림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며 7세기 경에 이르자 확실한 이슬람 국가로 돌아섰다.

현대 이집트의 역사는 1922년 경, 이집트가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는 독립 후 공화국을 세웠고, 1958년에는 시리아와 함께 아랍연합공화국을 세웠으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1961년에 소멸하였다. 이후 20세기 후반 내내 이집트는 극심한 종교적,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고,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에는 연이어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반복하며 가자 지구를 강제 점령하기도 하였다. 1978년에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가자 지구에서 물러났고, 이스라엘을 공인하며 평화 분위기를 붇돋았다. 그러나 이집트는 현재까지도 정치적 불안정을 거듭하고 있는데, 2011년 아랍의 봄 사태나 지속된 테러 사태, 경제불황 등 지속되는 악재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계속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는 현재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인권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집트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국어는 아랍어이다. 이집트는 1억 명이 넘는 인구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나이지리아와 에티오피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고 세계적으로도 13번째로 인구가 많다. 거의 대부분의 인구는 나일강 유역에 모여 살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나일 유역이 이집트 전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국토는 대부분이 척박한 사하라 사막에 속해있고,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대략 절반의 인구가 도심지에 몰려 살고 있으며, 특히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나일강 삼각지의 대도시들에 산다.

이집트는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세계에서 지역 강국 정도로 평가받는다. 중동에서 경제적으로도 규모가 큰 편이며 그 재원도 다양화되어 있으며, 그 잠재력이 상당하여 21세기에는 세계적으로도 발전이 주목되는 국가로 꼽히기도 한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에서 3번째로 거대한 경제규모를 보유하고 있으며, 명목 GDP로는 40번째, PPP로는 19번째로 거대한 경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는 UN의 창립 회원국이며, 아랍연맹, 아프리카 연합, 이슬람협력기구의 창립국이기도 하다.

More about 이집트

Basic information
  • Currency 이집트 파운드
  • Native name مصر
  • Calling code +20
  • Internet domain .eg
  • Mains voltage 220V/50Hz
  • Democracy index 2.93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107476864
  • 영역 1010407
  • Driving side right
기록
  •  
    기자의 피라미드
    선사시대와 고대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있는 유적들을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이집트 지역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수렵채집인들과 어로인들은 점차 밀을 재배해는 농부들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8000년 경에 급격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며 기존의 농경지가 메말라붙고 거대한 사막으로 변해버리자 살아남은 농부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웠던 나일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0년 경, 나일 계곡에 신석기가 도래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점차 부락들이 왕국의 형태를 띠며 독자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고, 크게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로 나뉘었다. 이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는 끊임없이 팽창했고, 결국 충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상이집트의 메네스 왕이 기원전 3150년 경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전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집트의 문화는 메네스 왕 이후 약 3,000여 년 동안 번성하였고, 동시대 전세계의 그 어떠한 곳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일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을 꽃피우며 국력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통일 후 찾아온 고왕국 시대는 기원전 2700년부터 220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때 기자의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여러 피라미드들이 대규모로 건축되었다.

    이집트 제1중간기는 고왕국 시대가 끝나고 여러 세력들이 난립하며 다투던 혼란기로 약 1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혼란기도 결국 끝났고, 기원전 2040년 경에 새롭게 세워진 중왕국 시대에 들어서 이집트는 또다시 번성을 맞는다. 특히 아메넴하트 3세의 재위기에는 이전의 그 어떠한 파라오의 재위기에도 이루지 못한 전성기를 맞으며 국력의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중왕국은 외부에서 힉소스인들이 쳐들어오면서 그 끝을 맞았고, 힉소스인들은 나일강 하류 대부분을 정복하고 아바리스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도 아흐모세 1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에 의해 쫒겨났고, 아흐모세 1세는 제18왕조를 개창하고 수도를 멤피스에서 테베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1550년부터 1070년까지 지속된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는 국력의 정점을 찍으며 전세계와 교역을 행했다. 이 시기 이집트는 남쪽으로는 리비아, 동쪽으로는 레반트까지 진출하였으며, 역대 왕조들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였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파라오들이 등장한 시기도 바로 이때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하트셉수트 여왕, 투트모세 3세, 아케나텐과 그의 아내인 네페르티티, 소년왕 투탕카멘, 이집트 최고 명군인 람세스 2세 등이 모두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이다. 이 시기에는 세계의 첫 유일신앙인 아텐 신앙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외국과의 잦은 접촉은 점차 이집트 사회에도 변혁을 불러오며 다양한 아이디어의 도입들을 촉진하기도 했다. 한편 신왕국도 점차 시간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리비아인, 누비아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결과적으로 몰아내고 다시 독립을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25년 경,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강력한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프삼티크 3세를 사로잡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캄비세스 2세는 파라오의 직함을 취했고, 이집트의 왕을 자처했으나 페르시아 수사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이집트를 통치하기를 택했다. 이후 기원전 525년부터 402년까지 지속된 이집트 제27왕조 기간 내내 이집트는 페르시아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페르시아의 황제는 자동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직도 동시에 겸했다. 기원전 5세기 내내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간혹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으나 페르시아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이집트 제30왕조는 이집트인들이 스스로 세운 최후의 왕조였으나, 결국 기원전 343년에 페르시아인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최후의 이집트인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는 전투에서 패배하며 완전히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31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들도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몇 십년 밖에 지나지 않아 또다시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여 이들을 정복하고 만 것이다. 이후 마케도니아 출신의 장군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 부관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를 물려받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하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및 로마 시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강력한 헬레니즘 국가였으며, 동쪽으로는 남부 시리아, 서쪽으로는 키레나이카까지 뻗어나갔으며 남쪽으로는 누비아와 국경을 접했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수많은 상선들이 이집트의 항구들을 들락날락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를 파라오라 칭하였고, 후기로 갈수록 아예 이집트인들에게 동화되어 이집트식으로 옷을 입거나 신전에도 이집트식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새겨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지배자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살하였고, 이후 내전에서 승리하나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계도 끊기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오히려 그 부는 여전했고 이집트는 광대한 로마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들 중 하나로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로 남았다. 기독교는 1세기 경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재위기에 이르러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그 통치권이 옮겨갔고, 이때 수많은 이집트계 기독교인들이 박해되어 숙청되었다. 이 시기에 신약성서가 이집트어로 번역되었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 이후, 이집트 콥트 교회가 설립되었다.

    중세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의 패권을 넘겨받은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 초 비잔티움-사산 전쟁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제국을 침공하여 1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점령한 것을 되찾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집트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아랍계 무슬림들이 비잔티움 군대를 이집트에서 꺾고 수니파 이슬람교를 전래시키기 시작하자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이집트인들은 수많은 종교들이 섞여 있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콥트 기독교, 이슬람교, 심지어는 수피교까지 수많은 종교를 믿고 있는 굉장히 다원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639년에는 이슬람의 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4,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집트에 파견하였다. 이후 640년 경에 이르자 이 군대는 중간에 6,000명 정도를 더 불려 몸집을 키웠고, 헬리오폴리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와 대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슬람 군대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했고, 알렉산드리아가 641년 11월 8일에 항복협정에 조인하면서 이집트는 아랍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645년에 공세를 펼쳐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되찾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646년에 다시 이슬람군에 빼앗겼다. 654년에는 콘스탄스 2세가 보낸 함대가 침몰하였고,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는 이집트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 무슬림들은 점령 직후 푸스타트라는 도시를 지어 이슬람의 이집트 수도로 삼았으나, 이 도시는 십자군 원정기에 불타고 말았다. 이후 986년에 카이로가 세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 세계 전체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로 떠오른다.

     
    카이로의 이븐 툴룬 모스크
    아바스 칼리파조

    이집트는 아바스 칼리파조에 이르러 그 세금이 유독 과중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믿던 콥트교 신자들이 반발하여 아바스의 지배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9세기 초에 들어서 압둘라 이븐 타히르의 재위기에 칼리프는 바그다드의 궁전에서 머무르고 이집트에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하게 하는 전통적인 지배 구조가 재확립되었다. 828년에는 또다른 반란이 일어났고, 831년에는 콥트교도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점차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세력 다툼 등 복합적 요소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이집트에는 수많은 무슬림 장군들이 할거하여 나름대로 왕조를 세우고 아바스 칼리파조에 반란을 일으키곤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툴루니드 왕조와 이크시드 왕조 등이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와 맘루크

    이집트의 무슬림들은 스스로 힘을 키운 이후, 아바스 칼리파조에서 독립하여 자치적인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파티마 칼리파조이다. 파티마 칼리파조는 카이로를 수도로 하여 약 6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장악하였다. 한편 쿠르드계의 아이유브 왕조가 끝나자, 군인 계급이었던 맘루크 계급이 1250년경 정권을 장악하여 이집트를 한시적으로 통치하였다. 13세기 말 즈음의 이집트는 홍해, 지중해를 통하여 활발한 교역을 통한 막강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도, 말레이시아, 동인도 등 세계 각국과 교류하였다. 한편 14세기 중반에는 세계를 덮친 흑사병의 피해로 인하여 이집트 전체 인구의 무려 40%가 사망하였다.

    근대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517년에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이후 1867년까지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내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시기 이집트는 점차 쇠퇴세를 걷게 되는데, 군비 증강과 군인 수 증가로 인하여 사회적, 경제적인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각종 역병들의 창궐로 인하여 이미 약해진 이집트 경제는 외국 자본들의 침입이 무력하였다. 점차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집트의 무역권들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그와중에 1687년부터 1731년 사이까지 무려 6번에 달하는 기근이 이집트를 덮치며 이집트는 갈수록 쇠퇴해갔다. 특히 심했던 1784년 대기근 때에는 이집트 전체 인구의 무려 6분의 1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상당히 다스리기 까다로운 지역이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상당한 국력과 아직도 남아있던 기존의 권력층인 맘루크 잔존 세력들 때문이었다. 이집트는 맘루크들의 자치 통치 하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반자치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1798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침략하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이집트를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다스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가 영국에게 패배하자 이집트는 갑작스레 권력 공백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제국, 이집트계 맘루크 계급, 마지막으로 오스만 제국을 등에 업은 알바니아계 상인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무함마드 알리 파샤
    무함마드 알리 왕조

    프랑스인들이 쫒겨난 이후, 이집트의 권력은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계 군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집트 총독’의 직위를 얻어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스만 제국과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권력을 장악한 직후, 맘루크 계급들을 집단으로 숙청한 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고, 이 왕조는 1952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1820년대에 이집트에 솜 재배업이 유입되었으며, 이후 19세기 말까지 이집트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면화 산업의 영향으로 인하여 지주와 농노 사이의 권력 구조가 강화되었으며, 해외로의 면화 수출을 통하여 이집트 경제의 국제 사회 개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무함마드 알리 총독은 1820년대 초반에 수단 북부를, 1833년에 시리아를, 나중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일부까지 이집트 내로 편입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리 총독이 결국 허약한 오스만 제국까지 집어삼키고 반서구적인 정책을 펼 것을 두려워한 서구 열강들은 그에게 대부분의 영토들을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알리 총독은 이후에도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각종 산업을 진흥시켰고 운하를 지었으며 각종 공무 제도들을 확충하며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알리 총독은 이집트를 점차 군국주의화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전체 인구의 4%에 달하는 사람들이 군대에서 복무할 정도로 비대한 군대를 운용하게 되었다. 이때 알리 총독의 정책이 마치 20세기 소련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알리 총독은 군대에도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농노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를 단행하였으며 서구식 장교들을 초빙하여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의무교육을 통하여 군인에 대한 자긍심을 크게 고취시키도록 만들었으며, 일종의 세뇌교육을 시도하여 성인 남성들이 군대식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하였다. 한편 이같은 군대식 개혁은 많은 부작용들도 불러왔다. 이집트는 중동이나 타 북아프리카계 국가들에 비하여 국민들의 기본적 수리력과 문해력이 부족했는데, 이는 교육이 오직 산업계와 군대에 한해서만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리 총독은 1848년 9월에 그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에게 총독직을 물려주었고, 1848년 11월에는 그의 손자인 아바스 1세에게 직위가 넘어갔으며, 1854년에는 사이드 파샤에게, 1863년에는 이스마일 파샤에게 넘어갔다. 이스마일 파샤는 이집트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였으며, 과학과 농업 기술 발전을 장려하기도 했다.

    알리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다만 1867년에는 ‘헤디위(Khedivate)’, 즉 자치 봉신국의 지위를 얻어내었으며, 1914년에 오스만 제국이 완전히 파탄나기까지 이같은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편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대운하인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의 합작으로 1869년에 완공되었다. 유럽의 은행들이 운하의 건설을 진행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집트는 외국에 엄청난 양의 빚을 지게 되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막대한 양의 돈이 관료들의 뒷주머니로 사라지며 이집트의 경제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정부는 재정을 보수하기 위하여 세금을 올렸고, 이는 사회적 불안정을 불러왔다. 1875년에 이스마일 파샤 총독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지분을 모두 영국에게 팔아치움으로서 겨우 이집트의 파산을 막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후 이집트 정부 내에 영국과 프랑스의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는 등 양국의 내정간섭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가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도 겹쳤는데, 1880년대에 대대적인 가축 전염병이 돌았으며 홍수, 내전들이 겹겹이 터지며 이집트는 갈수록 외채에 의존하는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국민들은 알리 왕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으며, 1879년에는 아흐메드 우라비를 중심으로 첫 민족주의 단체가 설립된다. 이후 이집트에서 알리 왕조와 국민들 간의 불화가 격화되자, 1882년에는 결국 영국이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이집트 군대를 꺾은 뒤 알리 왕조를 내세운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Ägyptisches Mittagessen.JPG 

    1899년에는 앵글로-이집트 합의에 의하여 수단이 이집트의 알리 왕조와 영국의 공동 통치 하에 놓일 것을 합의하였으나, 이는 말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수단을 지배하는 형국이었다. 1906년에 영국 장교들과 이집트 주민들 간의 불화가 곪아 터진 덴샤와이 사건(Denshawai incident)가 발생하자 상당수의 이집트 국민들은 아예 영국에서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집트 술탄국

    1914년에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동맹국들의 편에서 참전하자, 안그래도 영국에 적대적이었던 알리 왕조의 아바스 2세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였다. 결정 직후, 영국은 강제로 아바스 2세를 몰아내었고 그의 형제인 후세인 카멜을 대신 그 자리에 앉혔다.

    후세인 카멜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이집트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독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는 완전한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트 당이 당시 전세계에 불어닥친 민족자결주의 열풍을 이집트 내에서 이끌었고, 선거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하였다. 영국은 와프트 당의 지도자들을 1919년 3월에 해외로 추방했는데, 이로 인한 국민들의 반발이 터져나오며 첫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집트인들의 반발이 하도 극심해지자, 영국 정부도 어쩔 수 없이 1922년 2월 22일에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집트 왕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직후, 이집트 술탄국은 이집트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었으며 당시 술탄이었던 푸아드 1세는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다만 명목상으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이집트 왕국에는 여전히 영국군이 주둔하였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롭게 수립된 정부는 1923년에 헌법을 도입하였으며 의회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선거를 진행하였다. 이 총선거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와프드 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와프드 당의 지도자였던 사아드 자글룰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1936년에는 앵글로-이집트 조약이 맺어졌고, 마침내 영국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제외한 이집트 전역에서 철수하였다. 다만 이 조약에는 수단에 관련된 내용은 빠져있었고, 이에 따라 수단은 1899년 이래 이집트와 영국이 공동통치에 합의한 것이 암묵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말로, 말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통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통치라는 뜻이다.

    영국은 이집트를 북아프리카 지역의 세력 교두보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을 상대로 한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하며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동지중해의 핵심 거점이었던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 때문에 이집트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이 운하를 통하여 영국 본국과 인도, 오스트레일리아와 교류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영국 정부와 상반되게 이집트 정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이집트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나치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다만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으며 영국의 전쟁 지원국 정도로만 남았다. 1940년에는 이탈리아와도 국교를 단절하였으나, 심지어 이탈리아가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에도 이탈리아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파루크 국왕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영국을 특별히 돕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이집트 엘리트층들의 의식구조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당시 이집트인들은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심정적으로는 추축국 측에 일부 공감하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0년 6월에는 국왕이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알리 마허 총리를 해임하였으며, 하샨 파샤 사브리 총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1942년 2월, 영국의 마일스 램슨 경은 파루크 국왕에게 와프드 당이 주도하는 내각을 꾸리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자, 1942년 2월 4일에는 왕궁을 탱크와 병사로 포위한 후 국왕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며 새 내각 구성을 협박하였다. 국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친영 내각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는 국왕은 진노케 하였으며, 영국의 입맛에 맞는 정부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 국민들과 군부의 신임마저 잃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에서조차도 상당수 철수하였으나, 전쟁 전후 시기에 이집트인들의 반영 감정은 갈수록 커지고만 있었다. 게다가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이집트 왕국이 처참한 패배를 맛보며 왕정에 대한 불신도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선거에도 와프드 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국왕은 강제로 모스타파 엘-나하스를 새 총리로 지명하였다. 1951년에는 이집트가 일방적으로 1936년의 앵글로-이집트 조약에서 탈퇴하였으며, 모든 영국군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은 당연히 이집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집트 관료들은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 기지로 향하는 식수를 끊어버렸으며 식량 반입도 거부하였다. 또한 이집트 인부들이 기지 내부로 들어가는 것 또한 막았으며 게릴라전을 펼치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 기지는 반쯤은 전투 상황으로 변했으며, 마침내 1952년 1월 24일에 이집트 게릴라 군대가 경찰의 도움을 받아 기지를 기습하였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1월 25일에 보병과 탱크를 내보내 게릴라 군대를 돕고 있던 경찰에게 1시간을 주고 당장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경찰은 내무장관에게 연락했고, 항복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물어보았다. 내무장관은 ‘마지막 인원까지 싸워라’라고 답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경찰서는 박살났으며 43명의 이집트 경찰이, 3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 이 사건은 이집트 전역에서 격분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날인 1월 26일에는 카이로에서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반영 시위가 일어나 카이로 일부가 불에 타 전소하기도 했다. 파루크 국왕은 와프드 당에게 시위의 책임을 돌렸고, 총리를 해임한 후 알리 마허 파샤를 새로운 총리직에 앉혔다.

    1952년 7월 22일, 무하마드 나기브과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루크 1세는 그의 아들이지 태어난 지 7달 밖에 되지 않은 푸아드 2세에게 양위하였다. 왕실은 며칠 후 이집트를 떠났고, 무하마드 압델 모네임을 중심으로 한 섭정위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섭정위원회는 명목상의 통치기구일 뿐이었고, 실권은 당연히 나기브와 나세르가 이끄는 혁명통치위원회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대중들은 쿠데타 이후에는 개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였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유장교단은 마침내 왕정제와 1923년의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으며 1953년 6월 18일에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나기브 장군이 첫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나세르가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현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이집트 공화국

    1952년의 혁명 이후, 이집트의 실권은 자유장교단과 군부에게 넘어갔다. 군부는 모든 정당들을 법적으로 금지하였으며, 1953년 6월 18일에 이집트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나기브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약 1년 반 정도를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러나 나기브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54년에 범아랍주의자이자 1952년 혁명의 실세였던 나세르에 의하여 강제로 하야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나기브 대통령이 사임한 후, 나세르가 새롭게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은 1956년까지 공석이었다.

    1954년 10월에 이집트와 영국은 1899년의 앵글로-이집트 합의를 파기하고, 수단에게 독립을 주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는 1956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나세르 대통령은 1956년 6월에 취임하였으며, 영국군이 6월 13일에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철수하자 곧바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하였다. 나세르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서방권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로 인하여 2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운하를 점령하였으나, 이 전쟁이 더욱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 측에서 중재를 나섬으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합의하였다.

    아랍연합공화국

    1958년에 이집트와 시리아는 서로 국가를 합쳐 아랍연합공화국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1961년에 시리아가 탈퇴함으로써 3년만에 사라졌다. 아랍연합공화국은 북예멘과의 느슨한 연방을 이루고 있는 구조였으며, 1959년에는 가자 지구를 흡수하여 그 곳에 있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흡수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그 후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한편 나세르 대통령을 추종하는 자들이 모여 만든 정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이 1962년에 창당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 이집트는 북예멘 내전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나세르 대통령은 예멘 공화국군을 지원하였고, 7만 명에 달하는 이집트 군인들과 화학무기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내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기전의 늪에 빠져들었으며, 이집트는 예멘 내젠에 갈수록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한편 1967년 5월, 소련은 나세르 대통령에게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이를 ‘근거가 없다’고 일축하였고, 나세르 대통령은 5월 14일에 시나이의 이스라엘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고, 유엔 평화유지군들을 시나이반도에서 몰아내고 해협을 막아 이스라엘 선박들의 통행을 막음으로써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5월 26일에는 아예 대놓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라고 선포하며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티란 해협을 막은 것을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공격했고, 이집트가 1948년부터 점유하고 있던 시나이반도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다. 이후 계엄령이 발동되었고, 이 계엄령은 2012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계엄령이 발동되자 경찰의 공권력이 엄청나게 커졌으며, 국민들의 권리가 제한되었으며 언론과 문화 검열이 아예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집트 왕정이 1950년대에 몰락할 무렵, 이집트인들 가운데에서 상류층이라고 불릴 만한 인구는 50만 명이 채 안되었다. 중산층은 400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1,700만 명은 모두 하류층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적령기의 아이들 중 절반이 넘게 학교를 가지 않고 일터에서 일했다. 그러나 나세르 대통령이 이를 바꿔놓았는데, 대규모 토지 개혁과 분배 정책을 통하여 대학생 정원을 급속도로 늘렸으며 국영산업에 대한 대대적 투자로 인하여 극도의 사회적 유동성을 불어넣고 사회빈부격차를 완화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의 기간 동안 공립학교의 학생 수는 2배가 넘게 증가하였으며, 수 백만 명의 이집트 빈민들이 일자리와 교육을 통하여 서민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나세르가 1960년대 중후반부에 들어 독재의 면모를 보이고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는 등 악재가 이어지자, 이집트의 경제도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사회도 경직되며 나세르의 지지율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집트 아랍 공화국
     
    1979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사다트 대통령

    1970년에 마침내 독재자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급사하였으며, 대통령직은 안와르 사다트에게 넘어갔다.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의 고문관들을 국외로 추방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동맹에서 나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등 획기적인 면모들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규모 경제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1973년에는 시리아와 함께 4차 중동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을 예상하고 있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랍 세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대가로 시나이반도를 다시 얻어내게 된다.

    1975년에 사다트 대통령은 나세르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철회하고 외국 투자를 장려, 정부 규제를 철폐하는 등 경제 자유화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하여 세율이 하락하였고, 관세가 낮추어지며 일부 외국인 투자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투자는 저위험, 고수익의 사업들, 예를 들어 관광업이나 건설업 등에만 집중되었고 이집트의 인프라 투자는 갈수록 정체되었다. 사다트의 정책은 이집트 경제 현대화와 중산층 부양을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상류층들만을 살찌우는 결과를 낳았으며 곡류, 빵 등 기본적인 식량마저 부족해지며 1977년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7년에 사다트 대통령은 아랍사회주의연합을 해산시켰고, 국민민주당을 새롭게 창당하였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7년에 이스라엘에 역사적인 방문을 하였고, 이후에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에서부터 철수한다는 내용의 1979년의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맺었다. 사다트의 행동은 아랍 세계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이집트는 아랍 연맹에서 쫒겨나기까지 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사다트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1981년 10월에는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하여 암살당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무바라크 대통령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호스니 무바라크가 유일 후보로 나서서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관계를 다시 악화시켰으며, 이를 통하여 아랍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했는데, 농업과 관련 산업이 발전을 하고는 있으나 인구의 급격한 증가분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규모의 기아와 실업이 발생하였고, 수많은 농촌 인구가 카이로와 같은 대도시에 유입되면서 거대한 크기의 슬럼가를 형성하는 등 사회 치안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986년 2월 25일, 경찰이 근무기간이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카이로의 호텔, 나이트클럽, 식당, 카지노 등이 습격당했으며, 타 도시들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일상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군대가 나선 이후에도 질서가 회복되기까지 3일이나 걸렸으며 107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1980년대, 90년대, 2000년대에 이집트에서는 수많은 테러들이 일어났으며, 이집트 콥트교회 신자, 관광객, 정부 관료들을 상대로 한 테러가 빈번해졌다. 1990년대에는 이슬람 국단주의자 단체인 ‘알 가마 알 이슬라미야'가 대규모 테러 공격에 나서서 지식인들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폭력적인 테러를 행했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의 가장 주된 산업인 관광업에 엄청난 타격이 가해짐으로써 관광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무바라크의 통치기간 동안 이집트 정계는 국민민주당이 장악하였으며, 1993년에 기업독점법, 1995년에 언론법, 1999년 반정부방지법 등을 연이어 통과시키며 정부가 새로운 규제를 통과시키거나 형을 집행하는 데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고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말에는 정치적 탄압이 아예 공공연화되었으며, 정치적 야당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변해버린 채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독재가 자행되었다. 1997년 11월 17일에는 룩소르 근처에서 테러가 일어나 62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대부분이 관광객이었다.

    2005년 2월 말에 무바라크는 대통령 선거제 개정을 선포하였고, 1952년 이래 처음으로 다수의 후보가 등록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러나 새 법에는 여전히 후보 등록에 대한 제약이 남아있었고, 이로 인해 무바라크는 손쉽게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투표율은 심지어 25%에도 못미쳤다. 또한 외국의 선거 감시인들은 선거에 부정이 있음을 경고하였으며, 무바라크 대통령은 선거가 끝난 후 후보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2006년에 휴먼라이츠워치는 정례적인 고문, 임의적 형벌, 재판의 부재, 부정부패 등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폭로하였다. 2007년에는 엠네스티에서 이집트가 고문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고 비난하였으며, 테러와의 전쟁에서 타 국가들이 이집트에 용의자를 보내 고문하도록 할 정도로 고문이 심각하다고 밝혔다. 이집트 외무장관은 급히 이 보고서를 반박하였다.

    2007년 3월 19일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종교정당의 창립을 금지하였으며, 새로운 반테러법을 통과시켜 경찰의 임의 체포, 조사를 허용하였다. 또한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법적으로 선거를 감시할 수도 없도록 만들었다. 2009년에는 여당인 국민민주당의 대변인이 이집트의 정치 체계가 매우 복잡하며, 민주주의까지는 ‘갈길이 멀다’면서 현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실세는 군부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축하하는 인파들
    아랍의 봄

    2011년 1월 25일, 마침내 무바라크의 폭정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월 11일에는 드디어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였고, 카이로에서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듣고 카이로의 광장에서는 대규모 축하 파티가 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군부최고위원회의 위원장인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가 사실상의 국가원수로 등극하였다. 2월 13일에는 군부가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헌법의 효력을 중지하였다.

    3월 19일에는 개헌 국민투표가 열렸으며, 11월 28일에는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쫓겨난 이후 처음으로 의원선거가 열렸다. 투표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으며, 주된 소요 사태나 폭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무르시 대통령

    이슬람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 출신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2012년 6월 24일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2년 8월 2일에 이집트의 총리는 28명의 신인들로 구성된 35인의 내각 명단을 발표하였고, 이들 중 4명은 무슬림 형제단의 인사들이었다.

    제헌의회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입김이 강해지자, 자유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은 의회에서 탈퇴하였으며 무슬림 형제단은 무르시 대통령을 지지하며 세를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다. 2012년 11월 22일에는 무르시 대통령이 제헌의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행정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시행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 전역에서 폭동과 시위가 일어났고, 2012년 12월 5일에는 만 명대에 달하는 무르시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충돌하여 소요가 일어났다. 무르시 대통령은 야당 대표들과의 회담을 제안하였으나, 2012년 12월 헌법 국민투표를 취소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2013년 쿠데타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은 샤리아에 기본한 정책들을 피고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입안하며 신임을 잃어나갔다. 결국 2013년 7월 3일에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이 이끄는 정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여 쿠데타가 일어났고, 결국 군부가 모르시 대통령을 쫒아내고 과도 정부를 구성하였다. 2013년 7월 4일에는 68세의 헌법재판관인 아들리 만수르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으며, 새 정부는 성립 직후 무슬림 형제단의 인사들을 구금하거나 체포하였다. 체포된 이후 대부분의 인사들은 무기징역을 받거나 사형을 받았다.

    2014년 1월 18일에 과도 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이 국민투표에서 98.1%의 압도적인 찬성을 받아 통과시켰다. 전체 유권자의 38.6%가 국민투표에 참가하였고, 이는 무르시 정부 기간의 최고 투표율인 33%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
    엘시시 대통령

    2014년 3월 26일, 이집트의 국방장관이자 육군원수였던 압둘팟타흐 시시가 군에서 은퇴한 뒤에 2014년 대선에서 뛸 것을 공언하였다. 2014년 5월에 실시된 여론조사는 엘 시시의 대승을 예측하였으며, 실제로도 압승을 거두며 2014년 6월 8일에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만 무슬림 형제단과 일부 자유주의, 세속주의 정당들은 2014년 대선 자체를 보이콧하였다. 과도 정부가 심지어 선거 기간을 늘리면서까지 투표를 독려하였으나, 전체 유권자의 46%만이 투표에 참가하면서 2012년 대선의 52%보다 적은 수치를 띠었다.

    2015년 12월에 새로운 총선이 열렸으며, 시시 대통령의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의회에 입성하면서 시시 대통령에게 훈풍을 불었다. 2016년에 이집트는 이탈리아 학자인 기울리오레게니의 살해 사건으로 인하여 이탈리아와의 외교 갈등을 빚었다. 2016년 4월에는 마테오 렌치 총리가 이탈리아 대사를 카이로에서부터 귀국시켰으며, 이집트가 조사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탈리아 대사는 파올로 젠틸로니 총리에 의하여 2017년이 되어서야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다.

    시시 대통령은 2018년에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9년에 의회에 의하여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대통령의 권한과 군부의 권한을 늘리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통령의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늘렸으며, 시시 대통령이 앞으로 2번 더 대통령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같은 안은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집트는 2020년에 에티오피아 정부가 나일강 상류에 대규모 댐을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강력히 반발하며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이집트는 에티오피아가 댐을 세우면 나일강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나일강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이집트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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