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xt of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암하라어: የ ኢትዮጵያ ፈደራላዊ ዲሞክራሲያዊ ሪፐብሊክ 예 이티오피아 페데랄라위 디모크라시야위 리페블리크, 영어: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약칭 에티오피아(암하라어: ኢትዮጵያ 이티오피아, 영어: Ethiopia)는 아프리카에 있는 연방 공화국이며 수도는 아디스아바바이다. 1931년 이전에는 '아비시니아'(Abyssinia)라 불리기도 했다.

More about 에티오피아

Basic information
  • Currency 에티오피아 비르
  • Calling code +251
  • Internet domain .et
  • Mains voltage 220V/50Hz
  • Democracy index 3.38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120283026
  • 영역 1104300
  • Driving side right
기록
  • 고대
    고대

    인류학자들은 에티오피아 고원와 주변 지역이 현생 인류의 기원과 가까워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이 거주해왔다고 추정한다. 신석기 시대부터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인구가 나일강 또는 중동 지역에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인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에서는 기원전 1000년 경 이스라엘의 솔로몬왕과 지혜로운 스바 여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북에티오피아로 이주하여 에티오피아를 건국했다고 말하고 있다.

    기원전 약 8세기에 오늘날의 에리트리아와 티그라이 지역에 해당하는 홍해 연안에서 다못(Dʿmt)으로 불리는 왕국이 세워져 기원전 4세기까지 존속하였는데, 홍해 건너편의 사바 왕국과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기록한 사료는 많지 않으나 당시 관개 농법을 사용한 수수 재배와 철기 사용이 이루어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다못 왕국의 멸망 이후 해당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성립하였는데, 특히 기원후 1세기에 악숨에서 발원한 악숨 왕국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홍해 건너 예멘 지역까지 지배하였다. 3세기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예언가 마니는 당대 가장 강력한 국가 4개로 로마, 페르시아, 중국과 함께 악숨을 꼽기도 했다. 기원후 300년대에 페니키아 티레 출신으로 궁정의 노예가 된 프루멘티우스가 왕족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곧 악숨은 아르메니아 이후 세계에서 2번째로 기독교를 공인한 국가가 되었다. 6세기 경 이슬람의 발흥으로 영토를 빼앗긴 악숨 왕조는 이후 점점 쇠퇴하다가 940년에 멸망하였다. 당시의 정황에 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것이 많은데, 왕국을 파괴한 구디트(Gudit)가 여왕으로서 수십 년 간 에티오피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자그웨 왕조의 첫번째 왕에 의해 멸망했다고도 전해진다.

    에티오피아 제국 (12세기~1889년)

    12-13세기에 에티오피아를 지배한 자그웨 왕조는 쿠시족의 일파인 아가우족(Agaw)에 의해 세워졌는데, 1270년 예쿠노 암라크(Yekuno Amlak)가 자그웨의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이후 1974년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이어질 솔로몬 왕조를 세웠다. 예쿠노 암라크는 스스로를 고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메넬리크 1세의 후손으로 칭하였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중세부터 유럽의 왕국들과 외교적 관계를 맺은 기록이 남아있으며, 특히 다위트 2세 치하의 1508년부터는 포르투갈과 지속적인 국교를 맺기 시작했다. 16-17세기에는 에티오피아-아달 전쟁 등 이슬람 세력과 싸우며 독자성을 지켰으나 결과적으로 홍해 연안에 대한 지배력을 크게 잃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1769년부터 1855년까지 에티오피아에는 왕자 시대(Zemene Mesafint)로 불리는 고립기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황제의 권력은 명목상의 황위에 불과했으며 각지의 귀족, 제후들이 자신의 영역을 통치하여 실질적으로 여러 나라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이후 19세기부터는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으며 외교적 고립이 끝나가기 시작했으며, 1855년 테오드로스 2세가 암하라족을 중심으로 에티오피아 북부를 잠시 통일하며 왕권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근대화에 착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오로모족과 티그라이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868년 영국이 오스만의 편을 들며 침공한 후 테오드로스 2세는 마지막 전투에서 자결하였다. 이후 1875년과 1876년 오스만 세력이 두 차례 침공했으나 에티오피아는 모두 막아내었다. 1885~1889년에는 영국 편에서 마흐디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때 요하네스 4세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889년 즉위한 메넬리크 2세는 요하네스 4세의 뒤를 이어 영토의 확장과 근대화의 초석을 쌓았다.

    요하네스와 메넬리크 대에 에티오피아는 여러 정복 전쟁을 벌이며 오로모인, 소말리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살고 있던 남쪽의 넓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 이 시기에 본래 북부에 한정되어 있던 영토에서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영토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에는 식민지를 확장하려던 이탈리아군을 크게 무찌르며 아프리카의 몇 남지 않은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한편 1888년부터 1892년까지 이어진 대기근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 때 인구의 약 1/3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1916년에는 오로모족과 암하라족의 혼혈로 태어난 하일레 셀라시에가 자우디투의 섭정으로서 정권을 잡았는데, 그는 에티오피아 제국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본격적인 근대화를 진행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1930년에는 직접 황위에 올랐으며, 1931년에는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1935년 10월 2일부터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이 개시되었고 1936년 5월 2일, 이탈리아의 2차 공격에 패배하여 황제가 예루살렘으로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5월 5일 오후 5시(역사적 대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일부러 택한 날짜와 시간이다.)를 기해 이탈리아군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였다.[1] 이후 하일레 셀라시에는 국제 연맹에서 부당성을 호소하는 연설을 행하였으며, 이는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몰아낸 이후 영국의 도움으로 망명해있던 황제가 복위하여, 에티오피아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에티오피아는 20세기 동안 수백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탈리아 식민 시대에 금지되었다가 1942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의 선언에 의해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52년 에리트레아와 연방을 맺었고 1962년에는 완전히 자국 영토로 병합하면서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 전쟁 때는 대한민국에 병력을 지원하여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때는 육상선수 아베베 비킬라가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사회주의 군정

    한편 지속되는 경제난 속에 1973년 석유 파동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등 황제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1974년에 멩기스투 소령을 비롯한 군대 내의 마르크스주의자 사모임이 주도한 쿠데타로 제정이 폐지되었다. 군부는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하고 임시 위원회를 세워 국가를 통치하였는데, 군정 동안 군부의 공포정치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2천년 동안 이어져 온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교회가 문을 닫는 등 박해를 받았다. 이 군정기는 암하라어로 "위원회"를 의미하는 데르그(Derg)라고 불리고 있다.

    1974년 멩기스투 정권에 반발한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며 에티오피아 내전이 발발하였고, 내전은 1991년까지 이어지며 에티오피아에 큰 혼란을 몰고 왔다. 이와 함께 가뭄, 기아 등 국내문제가 이어졌으며 경제난은 개선되지 않고 에티오피아는 계속해서 해외원조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1987년 데르그는 국민투표를 거쳐 군부의 기구인 에티오피아 임시 군사 평의회(EPMAC)를 폐지,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을 성립시키고 멩기스투가 그 초대 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공산 진영이 붕괴하기 시작하고 멩기스투 정권을 지원해주던 소련이 외교적 간섭을 철회하자 군정은 자금난에 시달렸고 결국 반군을 주도하던 에티오피아 인민혁명 민주전선(EPRDF)이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과도정권을 선포하며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한편, 에티오피아의 영토로서 내전 동안 멩기스투 정권에 맞서싸우던 에리트레아 분리주의 반군은 1993년에 독립을 얻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연방 공화국

    과도정부를 거쳐 1995년 공식 출범한 에티오피아 연방 공화국은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연방제를 받아들였다. 1998년부터는 국경 문제로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2018년 아비 아머드가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곧 2000년도에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분쟁이 이어지던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에 대한 평화 협약을 성사시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민중 간의 분쟁으로 정국은 불안한 상황이다. 2020년 11월에는 티그라이인이 다수 거주하는 티그라이 주 정부와 아비 아머드가 주도하는 번영당의 중앙 정부 간의 갈등 끝에 티그라이 전쟁이 발생하였다.

    “에치오피아滅亡의 輓歌”. 동아일보. 1936년 5월 13일. 昨年十月二日부터 開始된 伊太利의 에치오피아侵略은 今年五月五日에 그 終結을 보게 되었다. 五月二日에는 에치오피아 皇帝가 首都아디스․아베바를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向하게 되엇고 伊太利軍은 五月五日五時(午後)에 堂堂하게 首都에 進入하게 되었다. 伊太利는 아마 이 歷史的大事實을 記念하기 爲해서 이와 같은 時日일 選擇하엿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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