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 성 베드로 대성전 )

성 베드로 대성전(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혹은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대성전(Basilica Vaticana)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전을 말한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전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전이 로마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가장 유명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으뜸 교회는 아니다. 로마 교구의 대성전의 명예를 지닌 교회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전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전은 4세기 이래 이 장소에 있었다. 대성전의 건설은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성 베드로 대성전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성 베드로의 매장 장소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세기에 예수가 승천하고 나서 그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갈릴래아에서 태어난 어부 출신으로, 베드로라고 알려진 시몬이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고 기독교 설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사도 바오로라고 알려진 타르수스의 바오로는 자신의 선교 여행과 여러 지역 교회를 훈계하고 격려한 내용을 담은 많은 서신을 썼는데, 이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 나가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성 바오로가 로마로 선교하러 떠났다는 것도 여기에 적혀 있다. 오래된 전승에 따라 성 베드로도 성 바오로처럼 로마로 길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믿어진다.

 
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청동상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로는 “페트루스(Petrus)”이며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Petros)”인데,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 베드로는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역십자가형). 그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 위 비아 코르넬리아로 통하는 인근 길에 묻혔다. 위치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공동묘지 장소로 알려졌다. 베드로의 무덤은 처음엔 기념비 하나 없이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붉은 돌만 있는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비(非)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 전날에 교황 비오 12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성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는 9세기 이래 접근하기 어려웠던 대성당 지하실 아래 구역을 조사하며 탐구한 지 1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매장 장소는 1세기에 교황 아나클레토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보다 위에 있는 지하 공간인 듯하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상상도, H.W.브루워, 1891
옛 대성당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서기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건설된 4세기 성당이다. 대성당은 동쪽 끝에 나온 부분에서부터 넓은 중랑(中廊)과 양쪽 통로가 있는 전형적인 라틴 십자가 양식이었다. 당시 넓이가 103.6미터(350피트)를 넘었으며, 입구는 거대한 열주 안뜰 앞에 있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가 묻힌 곳이라고 믿어진 작은 성소 위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15세기까지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대다수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무덤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지금의 대성당이 건립된 이후, 두 건물을 구별하고자 전에 사용했던 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고 부른다.[1] 본래 이 성당은 건물 안 중앙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묘소를 방문하려고 찾아온 순례자들을 위한 거주용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었으며, 고대와 중세 시절 교황의 거주지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과 인접한 라테라노 궁전이었다.

개축 계획

15세기 말, 아비뇽 유수기에 옛 대성당에 관리가 소홀하여 노후화가 극심해졌다. 그때마다 보수 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다시 짓거나 최소한 기본 구조의 변경을 고려한 최초의 교황은 교황 니콜라오 5세(1447 – 1455)였던 것 같다. 그는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옛 대성당의 보수 공사 권한을 주었으며, 특히 로셀리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 또는 옛 대성당의 과감한 변경 도면을 그릴 것을 명령하였다. 니콜라오 5세의 통치는 정치적 문제로 좌절되었으며, 그가 선종하자 별달리 이루어진 것도 없게 되었다.[2] 다만 그는 대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2,522개의 돌을 콜로세움에서 가져오도록 하였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니콜라오 5세의 선종이 대성당을 훼손하려는 사람들에게 내린 하늘의 경고라는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의 영광을 위하여 옛 건물을 헐고 화려한 건물로 바꾼다는 결정을 내렸다. 곧 설계 공모가 시행되었으며, 수많은 후보작 가운데 우피치 미술관의 설계도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120년 동안 수많은 교황과 건축가들이 건축 사업을 이어갔으며, 그들의 노력이 한데 모여 대성당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율리오 2세 때부터 시작된 계획은 레오 10세 (1513 – 1521), 하드리아노 6세 (1522 – 1523), 클레멘스 7세 (1523 – 1534), 바오로 3세 (1534 – 1549), 율리오 3세 (1550 – 1555), 마르첼로 2세 (1555), 바오로 4세 (1555 – 1559), 비오 4세 (1559 – 1565), 성 비오 5세 (1565 – 1572), 그레고리오 13세 (1572 – 1585), 식스토 5세 (1585 – 1590), 우르바노 7세 (1590), 그레고리오 14세 (1590 – 1591), 인노첸시오 9세 (1591), 클레멘스 8세 (1592 – 1605), 레오 11세 (1605), 바오로 5세 (1605 – 1621), 그레고리오 15세 (1621 – 1623), 우르바노 8세 (1623 – 1644) 그리고 인노첸시오 10세 (1644 – 1655)의 치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Boorsch, Suzanne (1982년). “The Building of the Vatican: The Papacy and Architec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Bulletin》 40 (3): 4–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JL-M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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