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neyland
( 디즈니랜드 )
디즈니랜드(영어: Disneyland)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자회사인 월트 디즈니 파크 앤 리조트가 운영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군 애너하임에 위치한 테마파크이다. 1955년 7월 17일 언론 매체에게 예비로 공개하였으며, 다음 날 공식적으로 개장하였다. 월트 디즈니는 개장 당시 유일한 테마파크였던 디즈니랜드가 고유의 특징을 살릴 수 있도록 건물들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개장 후에도 특별한 운영을 지도하였다.
최근까지 디즈니랜드에는 대통령과 왕족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귀빈을 포함하여 개장 이래 5억 15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였다. 1998년, 관련된 더 큰 규모의 디즈니랜드 리조트와 구별을 두기 위하여 "디즈니랜드 파크"로 브랜드명을 바꾸었다. 2007년은 14,800,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공원을 방문하여 월트 디즈니 월드의 매직 킹덤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관광객이 찾은 공원이 되었다.
디즈니 매직 킹덤 형식의 공원에서 발표하는 개장 연설은 플로리다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이 행복한 장소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로 시작하였다. 플로리다의 매직 킹덤 파크의 경우에는 다음 문장으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월트 디즈니 월드는 월터 엘리야스 디즈니의 철학과 삶에 보내는 선물입니다 ..." 한편 최초의 디즈니랜드 개장 연설은 다음과 같다.
디즈니랜드에 대한 발상은 어느 일요일, 월트 디즈니가 그의 어린 딸 다이앤, 샤론과 함께 그리피스 공원에 방문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딸들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계획을 생각해내었는데, 한동안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1]
얼마 후 월트 디즈니의 아버지가 시카고에서 열린 1893년 세계 박람회의 부지 건설을 원조하였고, 디즈니는 이 박람회를 통해 디즈니랜드를 세우고자 하는 창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박람회에는 싼 값에 조립된 각각의 개별적인 "국가" 지역이 있으며, 이 지역들은 인간의 다양한 역사를 표현하였다. 또한 최초의 관람차, 운송수단인 스카이라이드와 주위를 순회하며 도는 기차, 와일드 웨스트 쇼 등의 "탈것"도 마련되어 있]#=/#=/=2023-07-09나, . 1893년의 세계 박람회는 시카고에서 여름에 열린 마지막 박람회였지만,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의 날씨는 비, 눈과 얼음과 같은 기상 현상에 취약한 건물들이 세워진 "박람회 장소"에 적합했다. 이 박람회와 "탈것"이 가득한 "나라"이며 개별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디즈니랜드는 60년 후에 미국의 인구가 처음 서부의 사막 지대로 이동하던 1950년대에 만들어진다.[2]
많은 디즈니 영화의 팬들이 월트 디즈니에게 디즈니 스튜디오 방문에 대한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엔 스튜디오를 구경하고 캐릭터들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내용이 많았다. 월트는 이 편지들을 보고 영화 스튜디오에 방문객들을 위한 오락거리가 별로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버뱅크 스튜디오 건너편에 있던 강가를 가로지르는 1만 평 (8 에이커)의 부지에 "미키 마우스 공원"을 세우기로 구상하였다. 초기엔 보트와 여러 테마 공간이 있는 조그마한 공원을 기획하였다.
디즈니는 공원을 세우기 위해 티볼리 공원, 그린필드 빌리지, 어린이 동화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테마파크, 박물관, 박람회 등을 두루 다니며 공원 설계에 대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수집하였다. 그는 설계자들과 함께 구상한 일을 시작하였는데, 이때는 8 에이커보다 더 거대한 규모의 계획이 되어 있다.[3]
월트는 스탠포드 연구소의 컨설턴트 해리슨 프라이스를 고용하여 발전 가능성이 있는 부지를 조사하였다. 프라이스의 조언으로 디즈니는 로스앤젤레스 동남쪽에 있는 애너하임의 오렌지와 호도밭 부지 20만 평 (160 에이커)을 매입하였다.[4]
자금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지자 디즈니는 새로운 자금 조달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시청하는 텔레비전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곧 디즈니랜드라는 이름의 쇼를 만들어 ABC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신규 프로그램으로 방송하였다. 네트워크는 답례로 새로운 공원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운영 후 처음 5년 동안 디즈니랜드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과 ABC가 연대로 소유한 디즈니랜드 유한회사가 소유하였다.[5] 1960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은 ABC 주식을 매입하였다. 또한, U.S.A 메인 스트리트 지역의 많은 가게들은 디즈니로부터 부지를 임대 받은 다른 회사들이 소유, 운영하고 있다.
디즈니랜드 건설은 1954년 7월 18일 시작하였으며, 정확히 1년 후 완성하는데 미국 돈 1700만 달러가 들었다.[6] 건설과 동시에 U.S. 101번 고속도로도 부지 북쪽에서 새로 만들어졌다. 디즈니랜드로 인한 교통 체증을 미리 대비하기 위하여 개장하기 전부터 두 개의 도로를 추가로 고속도로에 건설하였다.[4]
1955년, 개장일디즈니랜드는 1955년 7월 18일 월요일에 정식으로 일반 대중에게 개장하였으나 특별히 하루 전인 1955년 7월 17일 일요일에는 일부 초청객과 언론인을 위한 "국제 언론 시연" 행사를 개최하였다. 개장 연설이 포함된 이 특별한 일요 행사는 할리우드에서 온 월트 디즈니의 친구 아트 링크레터, 밥 커밍스, 로날드 레이건이 사회를 맡았으며 전국의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하였다. ABC 방송국은 네트워크를 통해 이 행사를 생방송으로 중계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크고 복합적인 규모로 진행된 생방송 중 하나가 되었다.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공원은 가짜 초청권을 통해 입장한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디즈니랜드 주변의 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 섭씨 38도에 이른 뜨거운 날씨가 이어졌으며, 준공일 직전에 벌어졌던 배관공들의 파업으로 인해 식수대도 작동하지 않았다. 공원 개장을 후원하였던 펩시는 뜻하지 않게 관광객들로부터 소다를 팔기 위해 식수대를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아침에 깐 아스팔트는 채 굳지 않아서 여성들이 신은 하이힐이 아스팔트에 박혀 버리기도 했다. 자동판매기의 음식은 모두 동이 났고, 환상의 나라에서 가스가 누출되어 오후에는 모험의 나라, 개척의 나라, 환상의 나라를 모두 폐쇄하였다. 일부 부모들은 아더 왕의 회전목마에 자녀들을 태우기 위해 군중의 어깨 위로 자녀들을 던지기도 하였다.[7]
행사가 열린 날의 공원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보도되자, 월트 디즈니는 언론인들이 디즈니랜드의 진정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2번째 날"에 다시 초청하였고, 디즈니랜드 호텔에서 파티도 열었다. 월트와 1955년 당시의 행정 부서에서는 이후 이 날을 계속 "검은 일요일"이라고 불렀다. 매년 7월 17일마다 디즈니랜드의 캐스트들은 유니폼에 1955년 7월 17일로부터 몇 년이 흘렀는지 표시한 표를 꽂고 다닌다. 2004년 디즈니랜드의 슬로건은 "49년 전 오늘 마법이 시작되었다."였지만, 공원이 열린 지 12년부터 13년까지 디즈니는 7월 18일을 최초이자 정식으로 개장한 날로 표시하였다. 디즈니랜드는 1967년 7월 보도내용에서 1955년 7월 17일을 "헌정의 날"이라고 언급하였다.
7월 18일 월요일, 공원 입구엔 새벽 2시부터 줄이 생기며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표를 사서 처음 공원에 들어온 관광객은 데이비드 맥퍼슨으로, 로이 O. 디즈니가 입장권 번호 1번을 미리 구입해두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권 번호는 2번이었다. 월트 디즈니는 맥퍼슨 다음으로 입장한 크리스틴 베스 왓킨스 (1955년 당시 5살)와 마이클 스치와트너 (1955년 당시 7살), 이 두 명의 아이들과 기념 촬영을 가졌다. 2명의 사진은 "월트 디즈니와 디즈니랜드의 1번째 두 손님"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베스 왓킨스와 스치와트너는 그날 디즈니랜드 평생 입장권을 받았으며, 맥퍼슨은 나중에 간략한 절차로 받았다. 이후 이 평생 입장권으로 전 세계 모든 디즈니 소유의 공원에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 9월, 소비에트 연방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미국에서 13일 동안을 보냈다. 그는 두 가지 부탁을 하였는데,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는 것과, 할리우드에서 가장 돈을 잘 번 배우였던 존 웨인을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국무성 측에선 신변 보호를 이유로 흐루쇼프의 디즈니랜드 방문을 취소하였다.[8]
1990년, 파크에서 리조트로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디즈니랜드는 하나의 공원과 호텔 체제에서 점차 확장을 시도하였고, 기존 디즈니랜드 공원과 호텔, 대규모 주차장, 그리고 새로 매입한 주변 부지를 포괄한 더 큰 규모의 종합 관광 리조트가 되었다. 리조트에는 새로 매입한 부지에 건설된 또 다른 테마 파크 디즈니 캘리포니아 어드벤처, 쇼핑 상가•식당•오락 시설이 모여 있는 다운타운 디즈니, 새로 개조한 디즈니랜드 호텔, 디즈니 그랜드 캘리포니안 호텔, 새로 매입한 판 파시픽 호텔 (나중에 디즈니 파라다이스 피어 호텔로 개조 및 개명)을 추가하였다. 리조트 확장에 따라 2000년에 완공된 "미키와 친구들"은 10,250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디즈니랜드 남서쪽에 위치한 6층짜리 주차 건물로,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차장이다.[9]
1990년대 중반의 공원 경영관리부는 디즈니랜드의 애호가들과 종업원들 사이의 분쟁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새롭게 부임한 신시아 해리스와 폴 프레슬러는 공원의 이익을 올리는 효과를 목표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단기간에 주주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지만, 종업원들과 관광객들에게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대폭적인 비판을 받았다. 해리스와 프레슬러의 이러한 소매적 배경과 함께, 디즈니랜드의 주안점은 어트랙션에서 관련 상품 판매로 차츰 바뀌어갔다. 게다가 외부 컨설턴트 회사인 맥킨지 & 컴퍼니가 능률적인 운영에 도움을 주면서, 많은 변화와 삭감이 이루어졌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지연 관리 이후, 월트 디즈니의 테마 파크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모습은 등한시되어 갔다. 공원의 애호가들은 경영부가 고객과 공원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비난하며, 경영부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선 디즈니랜드전 디즈니 크루즈 라인 사장 매트 위멧은 2003년 후반 디즈니랜드 리조트의 운영 책임을 맡는 사장이 되었고, 얼마 후 그렉 에머를 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에머는 오랜 기간 동안 디즈니 캐스트로 일해 왔는데, 젊었을 땐 디즈니랜드에서 일하다 플로리다로 가서 월트 디즈니 월드 리조트의 복합 행정 관리 지도 자리를 맡고 있다. 위멧은 서둘러 과거의 안전 기록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경향에 반대된 분명한 것들을 정비해갔고, 특히 공원 내의 장식과 원래의 하부 조직 유지 계획으로의 복구를 중요시하였다. 월트 디즈니가 그랬던 것처럼, 위멧과 에머도 일하는 시간 동안 종종 각자의 직원과 함께 공원을 거닐었다. 공원에서 그들은 캐스트의 이름표를 달고, 어트랙션을 타기 위해 줄을 서거나 손님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기도 했다.
2006년 7월, 매트 위멧은 월트 디즈니 회사를 떠나서 스타우드 호텔 & 리조트 월드와이드의 사장으로 취임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트 디즈니 어트랙션 재팬의 경영 관리 책임자였던 에드 그리어가 디즈니랜드 리조트의 사장이 되었다. 그렉 에머는 2008년 2월 8일부로 부사장에서 은퇴하였다.
50주년 기념행사디즈니랜드 테마 파크는 공원 개장일 50주년을 기념하고자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총 18개월 동안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귀향"이라는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전 세계의 디즈니 공원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축제를 통해서 디즈니랜드의 역사적인 5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였다. 디즈니랜드는 2004년부터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혁신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스페이스 마운틴, 정글 크루즈, 월트 디즈니 매혹의 티키 방과 같은 많은 유명한 어트랙션들을 재건하였다. 50주년 기념행사는 2006년 9월 30일 종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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