كنيسة القيامة

( 성묘교회 )

성묘교회(라틴어: ecclesia Sancti Sepulchri, 히브리어: כנסיית הקבר הקדוש) 또는 거룩한 무덤 성당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구시가에 위치한 기독교 성당이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님 부활 기념 성당(그리스어: Ναός της Αναστάσεως, 아랍어: كنيسة القيامة)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뮤리스탄과 거리상으로 가깝다.

이곳 유적지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 시신이 묻혔던 곳, 즉 무덤이라 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골고타로 기념된다. 이 성당은 예수가 부활한 장소로 전해져, 적어도 4세기부터 중요한 기독교 성지 순례의 중요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성당의 사용권은 다양한 기독교 종파가 공유하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 뒤얽혀 혼합된 세속의 실체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에, 성당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여섯 종파인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본토이다.

건축

2세기 초반, 현재 성당의 유적지는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다. 몇몇 고대 작가들은 그 신전을 아프로디테를 그리스식 해석으로 대신하여 베누스 신전으로 묘사했다.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저서 콘스탄티누스의 삶[1]에서 본래 그 성당의 유적지는 기독교의 존숭지였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기독교를 혐오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그 때문에 그 성당 부지들을 고의적으로 매장하고 꼭대기에 그의 신전을 세웠다고 주장했다.[2](진위 여부는 아래 참조) 에우세비우스의 짧은 언급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디테 신전은 70년에 유태인의 반란과 132~135년에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일어난데 이어 대체로 하드리아누스가 135년에 그의 아엘리아 카피톨리아로 예루살렘을 개조한 도시의 일부였다.

약 325/326년경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신전을 파괴되었고 부지에 성당을 짓기 위하여 지역 주교인 예루살렘의 마카리우스에게 명령하여 신전을 평평하게 받치고 있던 흙을 제거하게 했다. 333년에 보르도 성지순례의 기록으로 현재 이곳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놀랄 만큼 아름다운 성당이 건축되고 있다.고 보고했다.[3]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모친 성녀 헬레나에게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리는 유적지에 성당을 건축할 것을 직접 당부했다. 326년에 그녀는 유적지의 교회 건축 현장에 와서 직접 나서서 인부들과 함께 땅을 파고 성당 건축을 도왔다.

발굴 작업 기간 동안에, 헬레나가 성십자가와 그 무덤을 재발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는 발굴 현장에 헬레나가 있었다는 내용이 없고 성묘의 진짜 십자가가 발견되었다는 기록 또한 전혀 없다.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무덤이 예수의 무덤이라는 명백하고 분명한 증거를 드러냈다고 한다.[4][5] 몇몇 학자들은 무비판적인 자료의 사용과 에드워드 기번과 같이 철저히 부정직하게 된 빌미를 제공한 에우세비우스의 기록[6]을 비난했다.[7] 예를 들어, 그 학자들은 에우세비우스의 저서의 장 제목에서[8] 허구들이 그의 입장에서 합법적이고 적합하게 기술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9]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380년 생.)은 '교회의 역사에서 그 발견에 대해서 충분히 해설하고 있는데,[10] (후일에 소조멘 그리고 데오도레트에 의해 재해석됨) 그 책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성당(이 성당 또한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에 의해 설립됨)와 꼭 같이 주님의 무덤 성당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발굴과 건축에서 헬레나의 역할을 강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성당은 두 곳의 다른 유적 성지를 연결하여 두 성당을 건축했다. 한쪽 가장자리에 전통의 골고타 유적지와 연결된 담장이 둘러진 열주 아트리움(트리포티코)으로 된 대성전(380년대에 에게리아 수녀가 방문한 순교자 유적지)과 아나스타시스("부활")이라고 불리는 헬레나와 마카리우스가 예수가 묻혔던 곳이라고 확신한 절석실의 유물을 포함한 로툰다가 그 두 성당이다. 건물 서쪽 끝 암벽은 잘려져 있었다. 고고학적인 조사로 현재의 로툰다 지반 안쪽에서 아프로디테 신전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신전의 바깥 담장은 심지어 더 서쪽에서 신전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건물 서쪽 끝 암벽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얼마나 많이 잔존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11]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무덤이 손상되지 않도록 무덤 주변에서 암벽을 분리 시킬 계획을 짰다고 한다. 로툰다 중앙부에는 코우보우클리온(Kουβούκλιον, 현시대 그리스어로 : 작은 칸막이) 또는 이디큘(Aedicule)[12](라틴어에서 유래 : aediculum, 작은 건물)이라고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은 무덤을 둘러 싸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무덤으로 추정되는 그 부분은 대리석 덮개로 완전히 뒤덮여 있기 때문에 현재 그 주장을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

성당의 서쪽 끝 담장 너머에서 쿠킴 무덤이 발견되었고 더 최근에 로툰다 바닥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로 최소한 10야드 길이의 폭이 좁은 돌출부 내부에 만일, 한때 그 작은 건물의 내용물이 있었다면, 그 돌출부는 암석 표면에 있어야 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로툰다의 돔은 4세기 말 쯤에 완공되었다.

동방 정교회는 매년 율리우스력에 따라 9월 13일(그레고리력으로는 9월 26일에 해당)에 봉헌 예식을 거행한다.

손상과 파괴  4세기 유적지의 평면도

그 건물은 호스로 2세 통치 하의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에 침입할 때 614년에 화재로 인해 손상을 입었고, 십자가는 빼앗겼다. 630년,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승리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전진했고 성십자가는 재건된 성묘 교회에 반환되었다. 무슬림의 점령 하에서도 기독교 성당은 보존되었다. 초기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도시의 기독교 유적지의 파괴와 주거지로의 사용을 금지하여 성지를 보호했다. 966년, 폭동 기간 동안에 출입구와 지붕이 파괴되었다.

1009년 10월 18일, 파티마 왕조 칼리프 알-하킴 비-암르 알라흐의 명령 하에 주님 무덤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당에서 일어난 연중 성령의 불 기적으로 인해 특히 더 활발하게 된 부활절의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교세가 알-하킴을 괴롭게 만들었음이 틀림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교회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또 다른 지역에서도 손상을 입은 커다란 타격들로 보아 기독교 지역들에 대항하는 더 대규모적인 군사 작전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차반네스의 아드헤마르의 기록에 따르면 리다에 있는 성 제오르지오 성당과 그 성인의 다른 많은 성당들이 공격받았고 '주님의 무덤 성당은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기독교 기록자 야히아 이븐 사이드는 '파괴가 불가능하거나 운반하기 너무 힘들 것 같은 부분들을 제외하고' 모조리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그 교회의 토대는 바닥 끝까지 분쇄되었다. 에디큘와 동쪽과 서쪽의 벽들과 무덤을 덮고 있는 마름돌 지붕은 파괴되었거나 손상을 입었다(동시대의 기록들은 다양함). 그러나, 북쪽과 남쪽의 벽들은 쇄석 더미에 의해 추가 손상이 방지 된 듯 했다. 화랑의 포장 도로에 세워져 있는 굉장한 기둥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사실상 현재에 남아있는 유일한 4세기 건물의 자취이다. 1009년 이후 즉각적으로, 예수의 무덤으로 가장 확실시 되는 곳을 몇몇 부분별로 소수의 복구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사실상의 복구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유럽인들의 반응은 지대한 영향과 심각한 결과 초래할 만큼 가히 충격적이었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예를 들면, 클루니의 수사 라올 글라버는 유태인들을 비난했고, 유태인들은 리모주와 프랑스의 다른 마을들에서도 추방당했다. 결국에, 그 파괴 행위들은 나중에 십자군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다.

재건축

1027~1028년에 파티마 왕조와 비잔티움 제국 간의 폭 넓은 협상으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협정에서 새로운 칼리프 알리 아즈-자히르(알-하킴의 아들)은 교회의 재건축과 재장식을 허락하는데 동의했다. 재건축은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코스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니케포루스의 엄청난 지출로 자금을 조달하여 1048년에 마침내 완공되었다. 그 양보로, 콘스탄티노플에 모스크 사원이 다시 열렸고 설교 중에는 알-자히르의 이름이 분명하게 들렸다고 전해진다. 무슬림 자료에 의하면 그 협정으로 인한 부가적인 영향으로 알-하킴의 박해 하에서 개종을 강요 받았던 많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슬람교의 철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비잔티움은 알-하킴에 의해 파괴된 다른 성당들을 복구하고 예루살렘 총대주교구의 복구를 위해 요구되는 5천명의 무슬림 포로들을 석방했다. 동시대의 무슬림 자료에는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황제가 성묘 교회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출하는 총액이 막대한 수였다고 확실히 기록되어있다. 비잔티움이 그 사업에 쏟아 붙는 총액이 막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의 복원 자원은 가용 자원을 훨씬 넘었다. 그래서 대바실리카는 폐허로 남겨 둘 수 밖에 없었고, 새 건축 사업은 로툰다와 그 곳 주면의 건물들을 줌심으로 진행되었다. 성당들이 하늘을 여는 궁전과 연결되어 연상되는 작은 다섯 성당의 조합으로 교회 부지에 재건축되었다. 그 성당들은 대교회의 성벽이 있는 부활의 궁전의 동쪽에 있다. 그 성당들은 그리스도의 수감과 매 맺으심과 같은 수난 장면을 기린다. 추측컨데 도시의 대로에 있는 성지들 사이에 자유로운 이동이 어렵기 때문에 그 곳에 성당들이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성당들의 봉헌 예식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성지 순례 의식에 있어서 중요성을 나타낸다. 대바실리카가 조금도 아니면 전혀 재건축되지 않았으므로, 그 성당들은 십자가의 길의 축소판으로 여겨진다. 예루살렘 서부 성지 순례지에서 11세기 동안에 폐허가 된 거룩한 성유적지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과 그와 관련된 성묘 교회의 통제권은 1099년에 십자군이 도착할 때까지 파티마 왕조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충성하는) 셀주크 투르크에 이르는 여러 해동안 실세의 변화가 지속되었다.

십자군 시대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1099년 7월 15일
1. 주님의 무덤 성당
2. 바위의 돔
3. 성벽

많은 역사가들은 소아시아에 침략한 터키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위협이 되어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 황제의 간언에 대한 응답으로 제1차 십자군을 요청한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아직도 주로 관계지어 거론한다.[출처 필요] 여전히, 역사가들은 1095년에 교황의 정책에 예수살렘과 그에 따르는 주님의 무덤 성당의 숙명은 직접적인 목표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데 동의한다. 예루살렘 탈환에 대한 관념은 십자군의 진로에 더 몰두하게 되었다. 재건축된 성당 부지는 1099년 7월 15일에 제1차 십자군 기사단에 의해 (그 근래에 아바스 왕조에게서 그 부지를 빼앗긴) 파티마 왕조에게서 탈환하게 되었다.

 주님의 무덤 성당 휘장

제1차 십자군은 무장 성지순례를 마음속에 그렸고 십자군의 그 누구도 주님의 무덤 성당 순례를 기도하러 가는 여행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십자군의 지휘관 고드프루아 드 부용 왕자는 첫 번째 예루살렘 십자군주국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생애 동안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자신을 아드보카투스 산크티 세풀츠리(주님 무덤의 보호자 또는 방어자)라고 선언했다. 십자군 시대에, 과거 성당 아래에 있는 우물이 헬레나가 성십자가를 발견한 장소라는 소문이 돌았고 경애로운 장소가 되기 시작했다. 후일에 그 우물은 십자가의 창조 성당이 되었지만, 그곳에서 11세기에 나돌던 소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현시대의 고고학적 연구조사로 모노마코스에 의해 복원된 11세기의 우물이라는 것으로 현재 판명나 있는 상태다[11].

연대기 편자 티레의 윌리엄은 12세기 중반의 성당의 혁신적인 수리에 대해서 보고했다. 십자군은 유적지의 동쪽 폐허들을 탐사했고 때때로 돌무더기를 파헤치기도 했다. 그들은 우물에 다다르려고 시도했고 하드리아누스의 담장형 신전이 있는 최초의 지반 의 일부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유의 계단 부분으로 그들이 최초에 발굴했던 터널을 넓혀 그 공간을 성당으로 변형해서 헬레나(성녀 헬레나 성당)에게 헌정하기로 결정했다. 십자군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성당을 재설비했고 종탑을 추가하였다. 그 공사는 처음으로 모든 유적지의 작은 성당들을 통합하는 작업이었고 멜리센데 왕비의 통치 기간 중인 1149년에 완공되어 모든 성지들이 처음으로 한 지붕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 성당은 최초의 라틴 총대주교좌 성당이 되었고 그 곳에는 왕국의 기록실이 생겼다. 제3차 십자군에 의해 기독교인들의 유적 성지 순례가 허가되어 조약으로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187년에 살라딘이 성당과 도시의 나머지 지역까지 점령했다. 13세기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파문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파문을 부정하며 조약에 의해 도시와 성당을 재탈환했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당이 성무 금지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기 시대  주님의 무덤 성당 (1906년). 약간의 복구 작업 이외에, 1852년 이래로 근본적인 형태는 변함 없었다. 오른쪽 윗 창문 아래에 작은 사다리는 최근 사진에서 볼 수있는 것과 같은 사다리이다. 1854년에 그 사다리를 치우자는데 동의가 없었기에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성지 순례자들의 수는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방치되었으므로, 1555년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그 곳을 더 새롭게 단장했다. 프란치스코회는 이디큘에 전실을 만들어 구조를 확장해서 그 작은 건물을 재건축했다.[13]. 1555년에 성당이 새로 단장된 이후에, 성당의 사용권은 프란치스코회와 정교회 사이를 오갔는데, 어느 공동체가 특정한 때에 숭고한 포르테에서 호의적인 칙령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고, 종종 노골적인 뇌물 수수와 격렬한 다툼은 대수롭지 않았다. 1767년, 계속되는 다툼에 지친 포르테는 성당을 권리 주장자들에게 분배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1808년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건축물에 극심한 손상을 입혔고, 로툰다의 돔이 무너져 내렸고 에디큘의 외관도 허물어졌다. 1809~1910년에 로툰다와 에디큘의 외관은 미틸리니의 건축가 콤미노스에 의해 그 무렵의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화재는 이디큘의 실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오늘날 천사의 성당이라고 알려진 서쪽에 있는 반원형으로 된 전실의 내관이 화재 이후에 정사각형 평면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재건축 되기는 했지만, 무덤의 대리석 장식은 주로 1555년에 복원된 작품이다. 1853년에 술탄으로부터 공포된 또 다른 칙령은 공동체 간의 영토 분할을 확고히 했고 "영원불변"한 제도로 현재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유지에 대해서와 한 창문 아래의 외벽 사다리를 제거하는 것까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그 사다리는 그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다.[14].

 1808년 복원 공사 이후의 성당.

콤미노스는 이디큘에 적색 대리석 외부 도장법을 적용해서 미관을 떨으뜨렸고, 하부 구조와는 동떨어지게 했다. 1947년에 영국령에 의해 그 건축물에 외부 철재도리 비계가 설치되어 유지되고 있다. 그 보수 공사에 대한 계획에는 아무런 합의도 없었다.

1959년부터 진행 중에 있었던 주님의 무덤 성당의 광범위한 현대식 리모델링의 일환으로 1994~1997년의 기간 동안에 성당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현재의 돔은 1970년대의 건축물이다, 1973~1978년의 복구 작업과 건불 내부 발굴 기간 동안에, 뮤리스탄 바로 근처의 저지대는 맨처음에 백색 멜레케 석회암을 캐던 채석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5]. 발굴단은 성녀 헬레나 성당의 동쪽에서 2세기에 아무림으로 그린 로마 함선의 그림[16]과 2세기에 하드리아누스의 신전에 포대를 거치하던 두개의 낮은 벽들과,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를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높은 벽을 발견했다.[17][18] 아르메니아 당국은 최근에 그 고고학적인 공간을 성 바르탄 성당으로 변경하였고 그 성당의 북쪽에 있는 채석장 위로 보도를 만들어, 성녀 헬레나 성당에서 (허가에 의해) 새로운 성당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성당의 수도 요금이 논쟁이 되어 예루살렘 시 의회가 수도 공급을 차단할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최근에 토론이 몇번 이루어졌다.[19]

NPNF2-01. Eusebius Pamphilius: Church History, Life of Constantine, Oration in Praise of Constantine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3:26 Itinerarium Burdigalense, page 594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Chapter 28 NPNF2-01. Eusebius Pamphilius: Church History, Life of Constantine, Oration in Praise of Constantine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Jacob Burckhardt (1853), The Age of Constantine the Great, page 283 Burgess, R. W., and Witold Witakowski. 1999. Studies in Eusebian and Post-Eusebian chronography 1. The "Chronici canones" of Eusebius of Caesarea: structure, content and chronology, AD 282-325 -- 2. The "Continuatio Antiochiensis Eusebii": a chronicle of Antioch and the Roman Near East during the Reigns of Constantine and Constantius II, AD 325-350. Historia (Wiesbaden, Germany), Heft 135. Stuttgart: Franz Steiner. Page 69. Eusebius, Preparation for the Gospel, 12:31 “Data for discussing the meaning of pseudos and Eusebius in PE XII, 31”. tertullian.org. 2010년 11월 4일에 확인함.  NPNF2-02. Socrates and Sozomenus Ecclesiastical Histories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 가 나 Virgilio Corbo, The Holy Sepulchre of Jerusalem (1981) Americans spell this as Edicule Jerome Murphy-O'Connor, The Holy Land, (2008), page 56 http://www.bibleinterp.com/articles/sepulchre.shtm[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A Work in Progress Hesemann, Michael (1999). 《Die Jesus-Tafel》. Freiburg. 170쪽. ISBN 3-451-27092-7.  (독일어) [1] Jerome Murphy-O'Connor, The Holy Land, (1998), page 59 the height difference can be easily seen - the yellowish wall on the left is the 4th century wall, the pinkish wall on the right is the 2nd century wall Israel threatens to cut off water supply to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AsiaNews.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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