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坂城

( 오사카성 )

오사카성 혹은 대판성(일본어: 大坂城, 大阪城)은 셋쓰국 히가시나리군 오사카에 있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성이다. 다른 이름은 긴조(金城) 혹은 긴조(錦城)로, 과거에는 오사카(大坂)가 근대에 와서 오사카(大阪)로 표기하도록 개정되었기 때문에, 현재에는 오사카(大阪)라고 많이 표기하고 있다. 또, 과거에는 오자카라고 읽었지만, 현재에는 오사카로 많이 읽힌다. 도요토미 정권의 본성으로 있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소실되었다. 그리고 그 후, 에도 시대에 재건을 해 에도 막부의 서일본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의 오사카조 공원(大阪城公園)이다. 구마모토성, 나고야성과 더불어 일본 3대 명성중 하나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성

 
도요토미 가문의 천수
〈오사카 여름의진도 병풍〉

1583년 센고쿠 시대 이시야마 혼간지와 그 절안에 위치한 마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을 개시했다.

완성에 1년반이 소요된 혼마루는 이시야마 혼간지터에 조성되었고, 천수는 옛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외관은 5층5계이다. 그리고, 기와등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했다. 히데요시의 임종이 있기까지 니노마루, 산노마루에는 소가마에[1]를 건설해 3중의 해자와 운하가 있는 견실한 성으로 완성되었다. 한창 오사카성을 축성할 때 히데요시를 방문한 오토모 소린이 성 주위를 둘러보고는〈오사카성은 삼국[2].무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축성자로 있는 히데요시 자신은 교토에 주라쿠 다이, 후시미성을 차례차례 축성하고, 오사카보다는 주로 교토에 머물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1599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의 혼마루로 이주한다. 또,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고다이로(五大老)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오사카성의 니노마루로 옮겨와 정무를 보아온다.

에도 시대

1603년 에도 막부가 성립된 후에도 히데요시 오사카성에 머물면서 셋쓰를 지배했고, 1614년 오사카성 겨울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이끄는 군의 공격을 물리친다. 그리고, 소마에와 산노마루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지만, 조건에 없는 니노마루의 외측 해자까지 메우게 되었다. 오사카성은 내측 해자와 혼마루만 남는 벌거벗은 성이 되어 버렸다. 히데요리는 매워진 외측 해자를 다시 만들었기 때문에 강화는 파기되어 겨울전투로부터 4개월 후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때 혼마루는 소실되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

 
소실전의 망루

재만 남은 오사카성은 당초에 이에야스의 외손인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에게 주었지만, 1619년 막부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1620년부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성이 재건되어 1629년 완성되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성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전체에 흙을 돋우어 그 위에 높은 석벽을 쌓아, 옛 도요토미씨의 오사카성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은 예전의 도요토미 가문의 성곽의 넓이에 1/4에 불과 했지만, 성의 상징인 천수는 크기와 높이면에서 기존의 도요토미씨 천수를 능가했고, 그 구조도 달랐다. 하지만, 외관은 5층으로 같다. 아마 이렇게 지어진 것은 옛 도요토미씨의 기억을 지우고 도쿠가와씨의 위세를 전국에 알리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막부 직할 성으로 있는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의 성주는 도쿠가와 막부가의 역대 쇼군이었고, 다이신[3]에서 선출해 오사카성 조다이[4]위탁했다. 또, 다이신보다 낮은 직급의 쇼신중에 6명을 선출해 2명은 오사카 조반과 오사카 가반을 두어 성을 경비했다. 에도 시대 여러번의 화재로 손상을 입어 수리를 했지만, 1665년 낙뢰로 인해 천수가 소실되었고, 그 후 천수의 복원은 없었다.


1868년 도바 후시미 전투 후, 막부군은 오사카성으로 패주했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배로 에도로 도망갔고, 오사카성은 신정부군에 개성되었다. 하지만, 전후 혼란속에 방화가 일어나 건물의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옛 제4사단 사령부
 
1930년 재건되는 천수각

메이지 신정부는 성내의 부지를 육군의 부지로 활용하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다. 동쪽에는 국철 조토선(현재의 오사카 순환선)까지의 거대한 지역에 병기공장을 지었고,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시 미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육군은 고호다이[5]를 설치하고, 보시업무를 개시했다. 1885년(메이지 18년) 와카야마성 니노마루로부터 어전 일부를 이축해, 기슈 어전이라 명명했다. 1888년(메이지 21년) 혼마루 사쿠라 문이 복원되었다. 1928년(쇼와 3년) 당시 오사카 시장 세키 하지메는 천수의 재건을 제안했고, 시민기금을 조성해 육군 제4사단 청사를 이전하고, 천수의 건설을 진행했다. 1931년(쇼와 6년) 철골 콘크리트로 복원 천수각을 준공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메이지 유신시에 소실을 면한 건물이 소실되었다. 특히 1945년(쇼와 20년) 8월 14일 공습에 의해 교토역까지 피난민으로 인파가 밀려들었고, 피난민중 다수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때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 본사 옥상에서 촬영한 천수각의 배경은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그 후, 이 사진은 오사카 여름전투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복원된 천수는 소실을 면했다.

종전 후 성내의 육군요지가 연합군에 접수되었고, 1947년(쇼와 22년) 미군에 의한 소실로 기슈 어전은 소실되었다.

1948년(쇼와 23년) 접수해제 후 건물의 수리가 진행되었고, 바깥 해자를 포함 넓은 지역이 오사카조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1950년(쇼와 25년) 태풍 제인에 의해 손상을 입어, 본격적인 보수작업을 시작한다. 더불어 학술조사도 실시되었다. 1959년(쇼와 34년) 지하에 도요토미씨의 오사카성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혼마루 내의 육군사단 사령부의 옛 시설은 잠깐 동안 오사카 부 경찰본부의 청사로 사용되어 성벽 일부를 사격훈련장으로 활용했다. 군수공장터에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남겨진 대량의 철과 구리를 노린 아팟치 족이 나타났고, 이것은 고마쓰 사쿄와 가이코 다케시의 소설의 무대가 되었다. 1983년(쇼와 58년)〈오사카 축성 400년 마쓰리〉를 겸해 오사카 순환선에 오사카조 공원 역이 신설되었고, 오사카성 홀도 개관되었다. 남아 있던 군수공장터에는 하나둘 대기업의 빌딩이 들어섰고, 성 북동쪽에는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가 조성되었다. 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외성의 일종으로 성곽안에 성하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서국: 규슈, 주고쿠 지방, 시코쿠. 동국: 간토 지방. 북국: 호쿠리쿠 지방 쇼군 직속 무사로 3천석이상의 다이묘 성을 대리로 관리하는 사람 보시를 위해 공포탄을 쏘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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