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xt of 프랑스

프랑스 공화국(프랑스어: République française), 약칭 프랑스(프랑스어: France)는 서유럽의 본토와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를 비롯해 여러 대륙에 걸친 해외 지역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주요 도시들은 파리, 마르세유, 리옹, 툴루즈, 니스, 낭트, 몽펠리에, 비시 등이 있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고, 프랑스 제1제국을 건국하고 통치하였다. 다만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제국은 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분란 거듭하다가 1870년에 들어서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당시 프랑스 식민제국은 1938년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당시 세계 인구의 5%가 프랑스 영토에 거주하였다. 프랑스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자 승전국이었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국제적 위상이 향상되는 효과를 누리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나치 독일에 의하여 본토가 점령되는 고초를 겪고 이후 독립을 원하는 식민지들과의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알제리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남 전쟁)이 있다. 1944년에 연합국 군대에 의하여 해방된 이후에는 프랑스 제4공화국 세우고, 알제리 전쟁을 거치며 와해됐다. 현재의 프랑스는 샤를 드 골 대통령이 1958년에 세운 프랑스 제5공화국이다.

제국의 유산으로 인하여 현재 약 3억 명이 프랑스어로 소통 가능하며, 프랑코포니 등을 통해 프랑스어 권 국가들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 행사하고 있다. EU 설립 시부터 EU federation 내에서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하였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 1966년에 탈퇴 이후 1992년에 재가입하였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이며 2018년 현재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에서...더 보기

프랑스 공화국(프랑스어: République française), 약칭 프랑스(프랑스어: France)는 서유럽의 본토와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를 비롯해 여러 대륙에 걸친 해외 지역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주요 도시들은 파리, 마르세유, 리옹, 툴루즈, 니스, 낭트, 몽펠리에, 비시 등이 있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고, 프랑스 제1제국을 건국하고 통치하였다. 다만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제국은 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분란 거듭하다가 1870년에 들어서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당시 프랑스 식민제국은 1938년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당시 세계 인구의 5%가 프랑스 영토에 거주하였다. 프랑스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자 승전국이었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국제적 위상이 향상되는 효과를 누리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나치 독일에 의하여 본토가 점령되는 고초를 겪고 이후 독립을 원하는 식민지들과의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알제리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남 전쟁)이 있다. 1944년에 연합국 군대에 의하여 해방된 이후에는 프랑스 제4공화국 세우고, 알제리 전쟁을 거치며 와해됐다. 현재의 프랑스는 샤를 드 골 대통령이 1958년에 세운 프랑스 제5공화국이다.

제국의 유산으로 인하여 현재 약 3억 명이 프랑스어로 소통 가능하며, 프랑코포니 등을 통해 프랑스어 권 국가들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 행사하고 있다. EU 설립 시부터 EU federation 내에서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하였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 1966년에 탈퇴 이후 1992년에 재가입하였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이며 2018년 현재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 유로국 세 번째로 크다. 같은 해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토탈, 사노피, GDF 수에즈, BNP 파리바, LVMH, 로레알 등이 프랑스 회사였다.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 국가, 대부분 제조업은 고 임금 강력한 노동계로 인해 쇠퇴하였다. 이 때문에 현재 서 유로 5대 경제 대국 중 제조업 비중이 제일 낮다. 임금은 서 유로 주요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 10년간 상승세가 가장 높았다. 대졸자 초봉은 2010년 당시 약 29,000유로(한화 약 3,872만원)에 달한다.

More about 프랑스

Basic information
  • Currency 유로
  • Native name France
  • Calling code +33
  • Internet domain .fr
  • Speed limit 130
  • Mains voltage 400V/50Hz
  • Democracy index 7.99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68373433
  • 영역 643801
  • Driving side right
기록
  • 프랑스에는 본디 갈리아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기원전 51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로마 제국에 정복당했으며, 이후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급격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프랑크족들이 476년에 이주해,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번영하였다. 허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이후에는 내전이 일어났고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이 분리됐다. 이 나뉜 왕국들 중 서프랑크 왕국이 987년에 프랑스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프랑스 왕국은 필리프 2세의 지배 하에 중세 유럽 주요 강대국로 급부상하였으며, 르네상스 기간에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더욱 발전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세력이 나뉘어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17세기 경에야 절대 왕정 치하에서 안정을 찾는다. 특히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 14세 때에는 유럽에서 가장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18세기 후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며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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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는 본디 갈리아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기원전 51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로마 제국에 정복당했으며, 이후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급격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프랑크족들이 476년에 이주해,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번영하였다. 허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이후에는 내전이 일어났고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이 분리됐다. 이 나뉜 왕국들 중 서프랑크 왕국이 987년에 프랑스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프랑스 왕국은 필리프 2세의 지배 하에 중세 유럽 주요 강대국로 급부상하였으며, 르네상스 기간에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더욱 발전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세력이 나뉘어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17세기 경에야 절대 왕정 치하에서 안정을 찾는다. 특히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 14세 때에는 유럽에서 가장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18세기 후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며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선사 시대

    현재의 프랑스 지방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시기는 180만 년 전 정도이며, 인류는 거친 기후와 빙하, 악독한 날씨 탓에 이보다 더 대규모로 북진하지는 못하였다. 인류는 이 곳에서 수렵채집인으로 살았으며, 동굴에 거주하며 많은 라스코 동굴 벽화와 같은 유적들과 작품들을 남겼다. 기원전 1만년 즈음부터는 해빙기가 찾아오며 날씨가 점차 온화해졌고, 기원전 7,000여 년에 이르자 신석기에 접어들었으며 거주하여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기원전 4,000년 경부터 야금술이 이 지역에 전파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금, 동, 나중에는 철까지도 제련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600년 경에 포카이아에서 건너온 이오니아인들이 지중해의 해안에 인접한 현재의 마르세유에 그리스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이 시기에는 켈트족 부족들이 프랑스 동부와 북부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프랑스 전역에 골족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골족의 개념 또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는데, 라인강, 피레네 산맥, 대서양, 지중해 사이의 지역들에 모여 사는 사람들을 골족들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근대 프랑스의 경계는 대략 고대 골족[1]의 영역과 거의 일치하기도 한다. 골족들은 대체적으로 풍요로운 문화를 향유하였으며, 남부 지방의 경우에는 선진적인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도 하였다. 기원전 390년 쯤에는 골족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침략해 들어가 로마 시를 점령하고 약탈한 일도 있었다. 골족들은 지속적으로 로마를 침략하였고, 기원전 345년에 평화 협약을 맺기 전까지 분탕질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 협약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골족들은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골족들은 끊임없이 국경 근처에서 로마를 도발하였다.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갈리아는 인적 결합체로서의 전사단인 몇 십 개의 키비타스(civitas)라고 하는 정치상의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2] 부족 내부에는 기사 및 성직자 등의 지배층과 무장능력을 지닌 일반 자유민 외에 노예가 있었으며, 목축과 원시적인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이 이루어졌다. 로마인들은 이들이 사는 지방을 갈리아라고 불렀다.

     
    웨르킨게토릭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모습
    삼국 시대

    한편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 장군, 대부호 크라수스와 야심 많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 정치 시대가 개막하였다. 당시 힘이 뻗쳐 오르고 있던 로마는 점차 그 정복의 칼끝을 유럽의 평원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카이사르는 알프스 산맥 너머에 있는 갈리아 지역을 "로마화"하여 로마의 힘을 만방에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세기경에 갈리아 전쟁을 펼쳐 골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고, 기원전 52년에 골족의 대장인 웨르킨게토릭스가 로마에게 항복하며 갈리아 지방은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51년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 지역을 평정하고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3] 이 때 일어난 로마의 국경 확장으로 인하여 당시 선진적인 로마의 문명이 라인 강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4] :9~10 웨르킨게토릭스가 카이사르에게 참패한 후, 라틴어가 켈트족의 언어를 빠르게 대체하였고, 골족들은 앞다투어 선진적인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로마에 동화되어 갔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로마 제국은 갈리아 속주에 많은 로마식 도시들을 세웠으며, 목욕탕, 포룸과 같은 건물들을 지으며 로마의 문화를 갈리아 지역에 퍼뜨렸다.[4] :12

    기원후 250년경, 갈리아 속주는 라인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야만인들의 침략에 신음하였으나, 이후 4세기 초반에 로마 제국이 중흥하는 데에 성공하며 다시 번영을 되찾았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세웠다. 황제가 직접 나서 기독교를 포교하자 갈리아 지방에서도 빠른 속도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4-5세기 무렵에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라틴계 교부인 성 제롬은 골 지역이 유일하게 "이교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기원후 4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이 과거의 영광을 잃고 힘이 약해지며 갈리아 지방의 동쪽 경계인 라인강 너머에서 게르만 부족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라인강을 따라 남하하였고, 주로 프랑크족이었던 그들은 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갈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5] 이때 갈로-로마 문화가 무너지고 암흑기에 접어든 것으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프랑크족들이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서구 기독교 문화의 연속성은 유지되었다.[5]

     
    카롤루스 대제
    중세 초기

    로마 제국이 크게 약화될 무렵, 골족들은 수많은 게르만족 왕국들과 수아송 왕국 등 서로마의 잔존 세력들로 나뉘었다. 이와 동시에 영국에서 도망쳐 온 켈트족들이 아르모니카 해안을 점거하고 그 곳에 거주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르모니카 해안의 반도가 브르타뉴로 불리게 되었으며, 켈트족의 문화가 부흥기를 맞아 인근 왕국들에게 큰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뿔뿔이 흩어진 채로 독립적으로 살고 있던 프랑크 족들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워 왕을 자칭한 자는 클로비스 1세였다. 481년부터 재위하였으며, 486년에 옛 로마의 잔존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며 입지를 굳혔다. 클로비스 1세는 서고트인들과 싸울 때에 기독교의 힘을 빌어 승리하였다고 선포하였고, 서고트인들에게서 프랑스 남서쪽 지방들을 탈환한 이후 508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클로비스 1세는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첫 게르만인 정복자였다. 특히 클로비스 1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단 아리우스파가 아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데, 이 덕분에 프랑스는 "교회의 장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La fille ainée de l’Église). 또한 교황에게서 '모든 프랑스 기독교인들의 왕 (Rex Christianissimu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은 로마와 골족들의 유산을 물려받아 라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다만 로마 제국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북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게르만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클로비스 1세는 파리에 수도를 두어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으나, 이 왕조는 그의 사후에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4개로 쪼개졌다. 이후 이 왕국들은 각자 약화된 채로 명맥을 이어갔고, 국왕들은 실권을 궁재들에게 빼앗겼다. 그 유력한 궁재들 중 한 명이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슬람교도들이 프랑스로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막았으며, 프랑크 왕국들 내에서 오히려 국왕보다도 신망을 얻었다. 그의 아들인 피피누스 3세가 결국 메로빙거 왕조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였으며, 직접 프랑크의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였다. 피피누스 3세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을 재통합하였으며, 서부와 중앙 유럽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카롤링거 왕조는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 하에 크게 번영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옛 서로마 제국의 관을 씌우며 신성 로마 제국을 열게 해주었으며, 프랑스는 이 때 이래로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옛 서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 노력하였으며, 영토 수복에 힘을 쏟았다. 카롤링거 왕조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 왕위에 오른 루도비쿠스 1세 때에도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루도비쿠스 1세가 죽은 이후 분열되었다. 카롤링거 왕조는 베르됭 조약 (843년)을 시작으로 후계자들의 내분으로 인하여 동프랑크(독일), 중프랑크(이탈리아), 서프랑크(프랑스)로 분리되기 시작했다.[3] 이 세 왕국들 중에서 서프랑크의 영역은 대략 현대 프랑스의 것과 비슷하며, 이 때문에 서 프랑크 왕국이 거의 현대 프랑스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9세기와 10세기경, 바이킹들이 끊임없이 프랑스를 침입해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왕권은 급추락하였다. 왕권은 가히 상징적인 수준으로 전락하였으며, 귀족들이 수없이 나타나 왕권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며, 강력한 대귀족들이 왕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곤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066년에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자신의 호칭에 추가하여, 마치 자신을 프랑스의 왕과 대등한 존재로 피력하기도 할 정도였다. 카롤링거 왕조는 파리의 백작이자 프랑스의 공작인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987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다.

     
    잔 다르크
    중세 중후반기

    카롤링거 왕조는 987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였으나, 프랑스의 공작이자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하며 그 막을 내렸다. 이후 그의 후손들인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전쟁과 정략 결혼을 통하여 프랑스의 영토들을 통합하였으며, 1190년경에 이르자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후대의 왕들은 국왕 직영지의 영토를 점차 늘려갔고, 15세기에 이르자 프랑스 본토의 대략 절반 정도, 프랑스의 북부와 중부, 서부가 국왕 직속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프랑스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변모하였으며, 철저한 계급제에 기반하여 귀족, 평민, 농노들을 차별하며 신분제를 확립하였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하여 교황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에서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수많은 기사들이 200여 년이 넘는 기간 넘게 전쟁에 꾸준하게 참여하였다. 이 때 프랑스인들이 워낙 많이 참전하였기에, 아랍인들은 십자군 기사들을 멸칭으로 프랑즈'Franj'로 불렀을 정도였다. 프랑스 십자군들은 프랑스어를 레반트 지방으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템플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에서도 다수를 점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템플 기사단의 경우, 프랑스 전역에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가에 엄청난 재정 지원을 해주곤 하였다. 다만 필리프 4세가 1307년에 기사단을 공격하였고, 우호 관계도 끊어졌다.오늘날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는 옥시타니아 지방의 이단 종파인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은 1209년에 시작되었다.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카타리파가 제거되고 남부 프랑스의 독립이 좌절되었다.[6]

    11세기부터는 앙주를 다스리던 플랜태저넷 가문이 멘 지방과 투렌 지방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잉글랜드와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현대 프랑스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프랑스 왕국과의 대립각을 세웠다. 프랑스 왕국과 플랜태저넷 가문이 세운 앙주 제국은 백 년 가까이 서로 대립하였고, 필리프 2세가 1202년과 1214년 사이에 앙주 제국을 공격하여 영국과 일부 지방을 남기고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하며 끝을 보았다. 부빈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한 플랜태저넷 가문은 영국으로 후퇴하였으나, 이후에도 영국의 플랜태저넷 가문과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ㅏㅏ 없이 사망하였다. 법에 의하면 프랑스 왕위는 여성이나 모계 쪽 인사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으므로, 왕위는 필리프 6세에게 내려갔다. 필리프 6세의 통치기 동안 프랑스 왕가는 중세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다만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1337년에 공격하며 빛이 바랬는데, 게다가 이때 프랑스는 흑사병이 대유행한 바로 직후였기에 공격에 더욱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에 돌입하였다.[7] 백년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우세했지만 잔 다르크와 같은 지도자들의 등장 및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근세 초기

    르네상스의 바람은 프랑스에도 불어닥쳤고, 이 시기 프랑스는 급격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처음으로 프랑스어를 표준화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 시도는 나중에 프랑스의 공식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나중에는 유럽의 귀족들이 주로 쓰는 언어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이탈리아 전쟁을 벌어지기도 하였다. 자크 카르티에와 사뮈엘 드 샹플랭과 같은 프랑스 탐험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프랑스의 식민지들을 개척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프랑스 식민 제국의 기틀을 잡으려 하였다. 이 시기에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과 부정부패에 맞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실시하며 유럽 전반적으로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 중 프랑스의 종교 전쟁 (1562–98)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1572년 수 천명의 위그노들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에 휘말려 살해되었던 것이다.[8] 종교 전쟁은 헨리 4세가 낭트 칙령을 반포하며 끝났다. 스페인은 종교 전쟁에서 가톨릭의 편을 들었고, 1597년에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였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3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을 잃었다.

    루이 13세의 치세 동안, 열성적인 리슐리외 추기경이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으며 1620년대에 사병을 해체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봉건 영주들의 성들을 차츰차츰 해체하였으며, 결투, 무기 소지, 사병 소유 등을 엄금하며 계획적으로 영주들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리슐리외는 왕권이 권력을 독점하도록 하였으며, 루이 1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양왕 루이 14세 초기와 안 도트리슈, 마자랭 추기경의 섭정기에 프롱드의 난이라고 불리는 소요가 일어났다. 이 난은 지나치게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왕실에 반발하여 지방의 대귀족들과 몇몇 지주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었으나, 곧 진압되었다.

    프랑스 절대 왕정(앙시앵 레짐)의 권력은 루이 14세의 재위기에 절정에 달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영주들을 불러모아 궁정을 채워 귀족화시켰으며, 지방을 안정시켰다. 루이 14세의 권위는 거의 신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수많은 전쟁들을 벌여 국력을 확장하였고, 이 시기에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로 떠올랐다. 프랑스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있어 유럽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프랑스어는 20세기까지 문학, 과학, 외교, 국제 문제에서 공공 언어로 떠오를 정도였다. 이 무렵에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비롯한 다양한 철학 사상들이 성립되었다. 계몽주의도 이 시기에 발달하였다.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대륙, 아시아 대륙에 수많은 식민지들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였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하여 이전 낭트 칙령을 폐기하였고, 이 때문에 수천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허나 루이 15세의 재위기에, 프랑스는 뉴프랑스를 잃었으며 7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인도에 두고 있던 식민지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반면 유럽 본토에서의 영토는 갈수록 넓어졌는데, 코르시카와 로렌 등의 지방을 새롭게 편입시킨 것이다. 다만 루이 15세는 박약한 통치를 펼쳤고, 잘못된 금융, 정치, 군사적 조치들을 남발하였으며 국민들의 신망도 잃었다. 심지어 그의 신하들마저 그를 존경하지 않았으며, 이 때 결국 15년후에 발생하는 프랑스 혁명의 포석이 깔리게 되었다.

    루이 15세의 손자였던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신생 미국 정부를 열렬히 지원하였고, 영국에게서 독립하는 것을 크게 도왔다. 허나 이 때 너무 많은 자금을 미국으로 보내어 시민들의 불만을 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몽주의가 발달하였고, 산소의 발견, 열기구의 발명과 같은 수많은 주요 과학적 혁신들이 나오며 점차 사회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프랑스의 과학자들과 탐험가들은 전지구로 여행을 떠나 해상 원정을 펼쳤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며 프랑스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다. 특히 합리성과 이성에 기반을 둔 계몽주의는 왕실의 정통성과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의 서문을 열게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루이 16세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자 결국 성직자, 귀족, 제3계급 등을 모은 삼부회를 열어 국난을 타개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부회의 부당한 투표 방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제3계급의 대표들이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였고,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국민의회의 대표들은 국왕이 무력을 사용하여 민중들을 탄압할 것을 우려하여 1789년 7월 14일에 절대 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이후 이 날은 혁명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789년 8월 초, 국민제헌의회는 사냥권이나 지주권과 같은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하였다. 또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인권의 기본 개념을 거의 세계 최초로 개창하였다. 이 선언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이고 양도불가능한 권리'로 '자유, 번영, 안전, 억압에 저항할 권리'를 명시해 놓았다. 발언과 출판의 자유가 이후 허가되었으며, 임의적인 체포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특권적인 귀족 계급들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한 권리와 자유를 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공무원들을 출생이나 신분이 아닌, 실력과 재능으로 뽑을 것을 요구하였다.

    1789년 11월, 의회는 국내에서 가장 거대한 토지 소유주였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팔아버리기로 의결하였다. 1790년 7월, 성직자기본법이 제정되어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를 재구성하였으며, 면세 특권 등의 권리들을 교회로부터 박탈하였다. 이는 국내에서 심각한 반발을 불러왔고, 몇년 후에는 내전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루이 16세는 국민적인 지지를 어느 정도 받고 있었고, 사람들도 왕정 자체를 폐지할 생각은 없었으나 루이 16세가 국외로 도주하려 시도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왕이 외국의 침공을 빌어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국왕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주장이 점차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91년 8월,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프로이센의 왕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를 위협하였고, 절대왕정을 복구하라고 명령하였다. 1791년 9월 경에는 의회에서 루이 16세에게 1791년 헌법을 인정하라고 압박하였으며, 전제군주정을 입헌군주정으로 바꾸는 데에 성공하였다. 새롭게 선출된 입법의회는 점차 파벌이 나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적대적인 자들이 지롱드파라고 불렸으며 전쟁을 지양하는 자들을 자코뱅파라고 불렀다. 허나 1792년에 지롱드파가 우위를 점했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국민들이 충분히 왕정 국가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결국 1792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1792년 8월 10일, 분노한 군중들이 궁전 주위를 포위하여 루이 16세를 협박하였고, 국왕은 입법의회로 도망쳤다. 1792년 8월에는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9월 초에는 프로이센 군대가 베르됭을 점령한 것에 대하여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1,500여 명의 귀족 출신 수감자들을 죽이며 9월 학살을 일으켰다. 의회와 파리 시위원회는 시민들의 분노 앞에 무력하였고, 학살을 제지하지도 못했다. 이후 전국에서 투표가 진행되었고, 국민공회가 새로운 프랑스의 의회로 설립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0일에 입법의회를 정식으로 계승하였고, 9월 21일에는 프랑스 제1공화국을 세우며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전 국왕 루이 16세는 반역죄로 고발되었고, 결국 1793년 1월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는 이에 힘입어 1792년 11월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1793년 3월에는 스페인에도 전쟁을 선포하였다. 1793년 봄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그해 3월에는 프랑스가 마인츠 공화국을 세웠다.

    1793년 3월, 성직자기본법과 군대 징집법에 반발한 벤디 지방이 파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프랑스 여러 지방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였으며, 국민공회 내부에서는 당파싸움이 격렬해지며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었다. 1793년 6월 2일에는 지롱드파들이 강제로 공회를 떠나도록 압박받았으며, 1793년 3월에 일어난 반란은 브르타뉴, 노르망디, 마르세유, 툴롱, 리옹 등 여러 대도시로 확대되었다. 파리의 국민공회는 1793년 10월과 12월 사이에 거의 1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이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내전이 1796년까지 지속되었으며, 대략 45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794년 2월에는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에서 노예제를 철폐하였다. 1793년 10월과 1794년 7월 사이에 국민공회에서 의원들 간의 불화는 점차 극에 달하였고, 여러 의원들이 처형당하거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대외적인 전쟁은 점차 호조를 보이고 있었는데, 프랑스 군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전 유럽에 전파하였으며 빈자들과 평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뿌리며 범국민적인 지지를 얻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인들도 이에 힘입어 사람들을 가톨릭과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게 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시대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으로 선출되어 프랑스 공화국의 권력을 틀어쥐었고, 나중에는 프랑스 제1제국의 첫 황제로 즉위하였다. 한편 군주정을 유지하던 유럽의 군주국들이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상대로 연합을 맺었고, 전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술을 바탕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유럽 대륙 거의 대부분을 정복하였으며,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들이 새롭게 세워진 왕국들의 국왕들로 옹립되었다. 이 승리들을 통하여 프랑스는 유럽 전역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보급할 수 있었으며, 국민의식과 인권 사상, 나폴레옹 법전 등을 널리 알렸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하여 모스크바까지 다다랐으나, 이후 전염병과 러시아의 살인적인 추위, 보급 문제 등에 시달리다고 결국 후퇴하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대패하고 돌아온 직후에는 숨죽이고 살고 있던 반나폴레옹 세력들이 유럽 전역에서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나폴레옹은 이 때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하며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은 이후 다시 한 번 유배지에서 돌아와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완전히 몰락하였고 부르봉 왕가가 다시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이후에도 국민들은 부르봉 왕가에 대하여 점차 적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며 결국 왕가는 다시 권력을 잃었고, 루이 필리프를 중심으로 한 7월 왕정이 세워졌다. 이 때 프랑스 군인들이 알제리를 정복하였고,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를 침공한 이후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식민지를 재개척하였다.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7월 왕정도 폐지되고 말았다. 노예제 폐지와 남성에게 주어진 선거권이 1848년에 다시 국민들에게 주어졌다. 이 해 1848년 프랑스 최초 직선제 대통력 선거에서 당선된 뒤, 1852년에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프랑스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었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2제국을 세워 나폴레옹 3세의 이름으로 제위에 올랐다. 나폴레옹 3세는 해외적인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특히 크림 반도, 멕시코, 이탈리아를 상대로 영향력을 늘렸다. 다만 1870년대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나폴레옹 3세는 권좌에서 쫒겨났고, 제국은 폐지되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세워졌다. 1875년 경에는 프랑스의 알제리 원정이 끝났고 대략 이 때에 825,000여 명의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식민제국을 세워 세계 전역에 식민지들을 경영하였다. 식민제국은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세워졌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는 대영제국의 뒤를 잇는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식민제국으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영향이 미치던 영토는 1,300만 제곱 킬로미터에 이르렀으며, 이는 세계 육지의 8.6%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이 시기에 국민들은 점차 향락주의와 번영에 빠져들었으며, 평화와 안정에 물들어 세속주의인 경향이 매우 강해졌다.그리고 나폴레옹 죽었다

     
    샤를 드 골 대통령
    현대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삼국 협상의 일원이었다. 프랑스와 그 우방국들은 엄청난 인명, 물질적 피해를 낸 이후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 군대들을 걲는데에 성공하였다. 세계 대전은 140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군인들이 죽였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4%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1912년과 1915년 사이에 징집으로 불려간 병사들 가운데에서 30%에 달하는 병사들이 사망하였다. 이 때에 인민 전선 정부는 8시간 근무, 여성 공무원 등 여러 사회적인 개혁들을 실시하였다.

    1940년에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았으며, 프랑스 북부는 독일 점령 지역, 동남부는 이탈리아 점령 구역, 나머지 구역은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이 세운 비시 프랑스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한편 샤를 드 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는 런던에 본부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나치에 대항하였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6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국민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사망하였다. 1943년 9월에 코르시카가 처음으로 추축국의 손아귀에서 풀려났으며,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국 군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치며 본격적인 프랑스 해방작전을 실시하였다. 이후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며 프랑스인들의 주권정부가 복구되었다. 샤를 드골이 이끄는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였으며, 나치에 협력하였던 자들을 공직에서 대거 해임하였다. 또한 사회복지제의 실시, 여성 선거권 보급 등 여러 사회 개혁들을 연이어 실시하였다.

    프랑스 임시 정부는 헌법을 제정하여 프랑스 제4공화국의 기초를 놓았으며, NATO의 창설국들 중 하나로 참여하며 국제 무대에도 복귀하였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복구하며 제국주의 야심을 드러냈으나,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에게 대패하며 꿈을 접어야만 했다. 몇 달 후에는 알제리에서 반식민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한 영유권을 지키기 위하여 반인권적인 고문들과 억압, 초사법적인 살인들을 저지르며 수많은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후 알제리는 거의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사회는 급속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후 국민들은 지도력이 약하고 무능한 제 4공화국에 염증을 느꼈고, 결국 1958년 드골이 지도하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시대로 들어갔다.[3] 5공화국은 상대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해졌다. 드골 대통령은 알제리 전쟁을 끝내기 위한 사전 작업에 착수하였고, 결국 1962년에 알제리를 독립시켜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독립의 과정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다. 가히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던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드 골은 '국가 독립'을 내세우며 서방과 동구권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였다. 프랑스는 나토의 군사적 행동에 상대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신 핵개발 계획에 착수하여 세계에서 4번째로 핵무기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그는 미국과 소련 간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재수립하였으나, 유럽 연합과 같이 초국가적인 단체의 결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968년에는 드 골에 반대하는 68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는 엄청난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시위 이후에는 세속주의, 개인주의, 성적 공공화가 일어난 것이다. 비록 혁명 자체는 정치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이는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불러왔고 결국 드 골 대통령은 이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프랑스는 드 골 대통령 이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선진국들 중 하나로 남았으나, 높은 실업률과 급증하는 국가 부채 등 여러 경제적 문제들에 직면하였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프랑스는 유럽 연합을 주도하는 등 유럽 통합에 앞장섰으며, 1999년에는 유로존을 설립하고 2007년에 리스본 조약을 서명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프랑스는 나토로 다시 재통합되었고, 나토와 관련된 전쟁에 가장 많이 참여한 회원국들 중 하나로 떠올랐다. 19세기 이후 프랑스는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는데, 대부분은 유럽 가톨릭 국가들에서 유입된 자들이었다. 21세기에는 수 천명의 무슬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 정부는 이민자들을 프랑스에 융화시키고 전통에 동화시키려 하던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였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키도록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골족은 켈트족의 일원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 가 나 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프랑스의 역사〉 ↑ 가 나 김복래. 《프랑스사》. 대한교과서(주) ISBN 89-378-3083-3.  |출판사=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1) (도움말) ↑ 가 나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도서출판 강, 2004, p.430 Massacre of the Pure Archived 2008년 1월 20일 - 웨이백 머신. Time. April 28, 1961. Don O'Reilly. "Hundred Years' War: Joan of Arc and the Siege of Orléans Archived 2006년 11월 9일 - 웨이백 머신". TheHistoryNet.com. Massacre of Saint Bartholomew’s Day. Encyclopaedia Britan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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