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xt of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공화국(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republiːk øːstɐraiç][*]), 줄여서 오스트리아(독일어: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øːstɐraiç][*])는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9개의 연방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빈이다. 북서쪽으로는 독일이 있고, 북쪽에는 체코 공화국, 북동쪽에는 슬로바키아, 동쪽에는 헝가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에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면적은 83,879 km2이며, 인구는 약 9백만 명 정도이다.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나, 실제로 국민들은 여러 종류의 방언들을 사용한다.

오스트리아는 976년 경 변경백국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에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왕가들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로 자리잡으며 점차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쳤고,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국력을 꾸준하게 키워나갔다. 19세기 초에 이르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졌으며, 독일 연방의 주도국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1867년에는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웠다.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한 직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전후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나, 승전국...더 보기

오스트리아 공화국(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republiːk øːstɐraiç][*]), 줄여서 오스트리아(독일어: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øːstɐraiç][*])는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9개의 연방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빈이다. 북서쪽으로는 독일이 있고, 북쪽에는 체코 공화국, 북동쪽에는 슬로바키아, 동쪽에는 헝가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에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면적은 83,879 km2이며, 인구는 약 9백만 명 정도이다.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나, 실제로 국민들은 여러 종류의 방언들을 사용한다.

오스트리아는 976년 경 변경백국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에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왕가들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로 자리잡으며 점차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쳤고,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국력을 꾸준하게 키워나갔다. 19세기 초에 이르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졌으며, 독일 연방의 주도국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1867년에는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웠다.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한 직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전후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나, 승전국들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결국 1919년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공식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계승국으로 인정받았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를 나치 독일에 합병하였다. 1945년에 나치가 패망한 이후에는 오스트리아도 잠시 동안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곧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세워져 주권국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며, 총리가 행정부의 수반이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심지에는 빈, 그랏츠, 린츠,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1인당 GDP로 세계 20위 안에 늘 들 정도로 부유한 국가이며, 삶의 질도 굉장히 높은 수준이며 인간개발지수도 세계에서 20위를 차지한 바 있다. 또한 수도인 빈 또한 그 수준이 높고 삶의 질이 높아 세계적인 척도가 될 정도이다.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은 1955년에 중립을 선포하였다. 1955년 이래 UN의 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OECD와 인터폴의 창립국이며, 1995년의 솅겐 협정에도 조인하였고 1999년에는 유로화를 도입하였다.

More about 오스트리아

Basic information
  • Currency 유로
  • Native name Österreich
  • Calling code +43
  • Internet domain .at
  • Mains voltage 230V/50Hz
  • Democracy index 8.16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8979894
  • 영역 83858
  • Driving side right
기록
  • 중세

    한때 전 유럽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마 제국이 쇠망하고 난 이후, 유럽에는 슬라브족, 아바르족, 훈족 등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략하였다. 이후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샤를마뉴 대제가 788년 경에 혼란스러운 유럽 일대의 질서를 일부 다잡았고, 기독교를 전역에 포교하며 세를 넓혀갔다.[1] 현재 오스트리아 지방은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는데, 오토 2세가 바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에게 976년에 오스트리아 변경백의 지위를 내렸고,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안동안 바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오스트리아’라는 지명은 996년에 작성된 바벤부르크 가문 관련 문서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1156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를 공작령으로 승격하였고, 1192년에는 바벤부르크 가문이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위를 동시에 획득하면서 그 세를 점점 넓혀갔다. 그러나 1246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부르크 가문의 대도 끊어졌고 오스트리아 공작위의 자리도 비고 말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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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한때 전 유럽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마 제국이 쇠망하고 난 이후, 유럽에는 슬라브족, 아바르족, 훈족 등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략하였다. 이후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샤를마뉴 대제가 788년 경에 혼란스러운 유럽 일대의 질서를 일부 다잡았고, 기독교를 전역에 포교하며 세를 넓혀갔다.[1] 현재 오스트리아 지방은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는데, 오토 2세가 바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에게 976년에 오스트리아 변경백의 지위를 내렸고,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안동안 바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오스트리아’라는 지명은 996년에 작성된 바벤부르크 가문 관련 문서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1156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를 공작령으로 승격하였고, 1192년에는 바벤부르크 가문이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위를 동시에 획득하면서 그 세를 점점 넓혀갔다. 그러나 1246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부르크 가문의 대도 끊어졌고 오스트리아 공작위의 자리도 비고 말았다.[2]

    당시 오스트리아에게 대공위 시대가 찾아온 때는 마침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 시대와 시기가 겹쳤으며, 오스트리아 지역은 중부 유럽 전체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편 지배 가문이 사라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였다.[3] 그러나 그가 1278년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루돌프 1세에게 격퇴당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몇 백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스위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서 떨어져 나가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자신들의 본토로 여기게 된다.

    14세기와 15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하며 주변의 국가들은 점차 흡수해나가며 힘을 길러나갔다. 1438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왕 지위를 획득한 후,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을 1453년에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시켰으며, 이후에는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아 기타 선제후국들이나 제후국들과 격을 달리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수도였으며 인구도 몇 만명에 육박했던 빈도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군사적 정복이 아닌 결혼이나 혈연 관계를 통하여 영토를 넓혀갔는데, 1477년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재위 시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에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유럽의 중심 가문으로 부상한 것이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였던 마리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마리는 프랑스의 압박으로부터 공국을 지키기 위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인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였다. 이때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와 네덜란드를 펠리페 1세가 물려받으면서 이 영토가 그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4] 한편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펠리페 1세는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1세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 후아나 왕녀와 결혼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까지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펠리페 1세의 아들인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고, 기존의 합스부르크 영지와 함께 스페인 왕위에 오르며 카를 5세가 되어 유럽 중남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한편 막시밀리안 1세의 혈연을 통한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대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야기에우어 왕조의 왕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에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영토들도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상속되었다. 1521년에는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직을 물려받았으며, 1526년에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위에 연달아 오르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세워졌다.[5] 페르디난트 1세가 새롭게 가지고 온 동유럽 영토들은 오스트리아의 국력 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스트리아는 단숨에 중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떠올랐으며, 이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에 오스트리아가 패전하여 해체되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다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느슨한 동군연합 체제였으며, 타 국가들과 달리 내부적으로 결속되어있지는 못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달리 적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부르고뉴 지방, 네덜란드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은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주었으며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분가하여 넘겨주었다.

    1526년에 모하치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지 않은 보헤미아와 헝가리 지방이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6]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지속적으로 헝가리 쪽으로 동진하며 팽창 정책을 펴나가자 결국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잦은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이후 약 백여년 동안 기나긴 전쟁을 이어갔다. 1529년에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최대 명군이었던 슐레이만 대제가 1차 빈 포위를 개시하였으나, 이른 겨울과 눈서리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기도 했다.[7]

    17,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1657년에서 1705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다스린 레오폴드 1세의 시기 동안 오스트리아의 국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683년에 폴란드의 왕인 얀 3세의 지휘 하에 1683년에 성공적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막아낸 이후에는[8]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펼쳐 헝가리 영토의 대부분을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영토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가 지난 세월 동안 얻어낸 영토 상당수를 포기하는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정당한 세습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카를 6세는 1713년에 국사조칙을 발표하여 자신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뜻을 밝혔으며, 17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여성에게 황위를 이어받게 하겠다는 카를 6세에 대한 반대의 뜻이 강했으며, 이때 서로 황위를 주장하기 시작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졌다. 이때 때마침 힘을 키우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이 슐레지엔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했고, 결국 이때 오스트리아는 2차례의 전쟁으로 슐레지엔 지방을 상실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위를 차지한 뒤 프로이센에게 복수를 준비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 맞서기 위하여 당시 루이 15세가 다스리고 있던 프랑스와 엘리자베타 여제가 다스리고 있던 러시아와 연합을 맺어 포위 전선을 구축하였다. 전쟁은 수적으로 우세했던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국 측에게 우세하게 흘러갔으나, 러시아에서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자 러시아가 동맹에서 이탈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동맹국들까지 철수해버리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도 슐레지엔을 포기하며 프로이센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약 30여 년 동안 프로이센을 본딴 개혁을 통하여 내정에 힘썼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이전과 구분하여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라고 부른다.

    19세기

    1700년대 말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공화정의 열풍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왕정제 철폐의 바람이 유럽에 미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연합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 혁명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며 그 위상이 크게 깎여나갔다. 이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제국을 세우자, 당시 로마의 황제를 자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권위가 무색해졌고, 결국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고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섰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영토를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했고, 1809년에 또 전쟁을 일으켰다가 다시 패배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다. 한편 인적 피해도 엄청나서, 1792년부터 1801년까지 오스트리아는 약 754,700여 명에 달하는 전쟁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한편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가 휘청거리자, 유럽 내에서는 다시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빈 회의가 1815년에 열렸고, 오스트리아의 주도 하에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도 점차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아들이지만은 않았고, 오스트리아 본국과 독일 내부의 불화가 점차 계속 심해지자 1848년에 독일을 통일하고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기 위한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혁명을 억누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1866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비스마르크 재상이 이끌던 프로이센에게 패배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을 잃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빼앗기며 물러나야 했다. 게다가 전통적 우방이던 바이에른 왕국마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으며 오스트리아의 독일 내 영향력은 날로 축소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에서도 영향력을 상실하고 위상이 예전같지 않자, 동부의 헝가리 지방에서도 독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제국 정부는 헝가리 분리주의자들에게 이중 정부를 제안했고, 이 때 체결된 1867년의 대타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설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유일한 황제로 모셨으나, 교회나 정부, 의회 등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서로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일종의 이중 제국이었다. 또한 다양한 슬라브계열 민족들, 크로아티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는 다민족 제국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막 떠오르고 있던 민족주의 열풍 때문에 심각한 고질적 내분을 겪게 된다. 내부의 민족들이 자신들끼리 독립해 나가려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이다. 제국은 비밀경찰을 확대하여 이들을 감시하기도 했으며, 8개 국어로 법령을 반포하고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각 민족들의 모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며 이러한 불화를 막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강렬했던 민족주의 세력은 범독일주의 세력이었다. 몇몇 극단주의 세력들은 오스트리아의 독일계를 자극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의 합병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일부 정치가들은 범독일주의 포퓰리즘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시도하는 등 정계도 대단히 혼란스러웠다.[9] 다만 당시 독일 내부를 주도하고 있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류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스트리아의 범독일주의자들은 독일의 빌헬름 1세가 가장 좋아한다는 꽃인 푸른색 수레국화를 단추에 꽂고 다니거나 독일의 상징색이었던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을 즐겨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표시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학교에서 이를 금지하고 범독일주의자들을 탄압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범독일주의자들과 타 민족들 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고조되었다.[10] 범독일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이후에 독일에 합류하기를 바랐으며, 이 때문에 독일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범독일주의자 계열의 정치인들이 독일계 국민들에게 이탈리아의 천주교회에서 나와 독일계 교회로 옮겨갈 것을 요구하며 사회 갈등이 종교에까지 미치니, 제국 내부의 상황은 갈수록 불안정해져만 갔다.

    20세기

    동쪽의 오스만 제국이 황제와 장교들 간의 싸움으로 점차 망조가 들어가고 그 국력이 현저히 약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때를 틈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1908년에 합병한다. 그러나 이 합병은 인근의 세르비아 왕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1914년에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을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전쟁이 터졌다.[11] 이 전쟁은 서로 간의 동맹국들 간의 참전을 통하여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왔으며,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1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1918년 10월 21일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의원들이 빈에서 회담을 열었고, 임시 정부를 먼저 세우고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0월 30일에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설립되었으며, 황제도 이를 인정하여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대표를 이탈리아와의 협정 체결에 대표로 보내기도 하였다.[12]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황제는 1918년 11월에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11월 12일에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공화정을 선포하고 왕정을 폐지하였다.

    1919년에는 생제르맹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는 갈기갈기 찢어져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조약으로 인하여 독일어를 사용하는 일부 지방들만 수중에 겨우 남겼으며, 한때 중부 유럽을 대부분 재패하였던 영토의 크기는 크게 축소되었다. 11월 12일에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헌법을 만들고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민주공화국이다’와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이다’를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민들 모두가 서로 영토를 합쳐 동일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독일의 힘이 커질까 두려워한 프랑스와 영국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고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을 통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을 막아버렸다. 또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아예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바꾸게 강제했다.[13]

    생 제르맹 조약으로 인하여 3백만 명이 넘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떨어져나간 지역들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티롤 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보헤미아 등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티롤 주는 1980년대에 이탈리아가 전격 자치권을 부여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주된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
    제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직후,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당시 통화였던 크론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1922년 가을에는 국제연맹에서 융자를 받아 파산을 겨우 틀어막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경제 주권이 한시적으로 국제연맹으로 옮겨갔다. 1925년에는 마침내 오스트리아 정부가 크론화 대신 실링화를 새로이 도입하였으며, 10,000:1의 비율로 크론화와 교환하도록 하였다. 이후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오스트리아는 짧은 경제적 호황기를 누렸으나, 1929년에 미국에서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고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이 호황기도 얼마 지나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1933년에 극우 정당 출신의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이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를 해산하고 권위주의 정권을 세우면서 그 막을 내린다. 돌푸스 수상 직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정계에는 사회민주당과 보수당 측이 서로 양분하고 있었는데, 사회민주당은 공화수호동맹이라는 이름의 준군사조직을 운용하며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14] 그러던 중 사회민주당과 보수당 측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돌푸스 수상을 국가수반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돌푸스 수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재의 야심을 드러내고 의회를 해산하였고, 점차 극우적 면모를 드러내며 야당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1934년 2월에는 공화수호동맹의 인사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잡혀들어갔으며, 사회민주당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관련 인사들은 구속되거나 해외로 쫒겨났다. 이때 돌푸스 수상과 극우세력은 자신들의 위협으로 여긴 나치당 또한 동시에 탄압했다. 그러던 중 1934년 5월 1일에 오스트리아 파시스트들과 돌푸스 수상은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돌푸스 수상은 7월 25일에 일어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로 암살당했다.[15]

    돌푸스 수상의 뒤를 이은 쿠르트 슈슈니크는 이전 정권보다 훨씬 독일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오스트리아를 ‘독일계 국가’로 선포하되 다만 독일로부터 독립은 유지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1938년 5월에 국민투표를 열어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의 합병을 투표에 부치기로 합의하였으나,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계를 장악하고 독일군이 국내로 침공하여 국민투표 실시 자체를 차단해버리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1938년 3월 13일에는 독일이 안슐루스를 선언하면서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고야 만다. 2일 후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품에 돌아왔다’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으며, 오스트리아를 완전한 독일령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합병된 이후, 1938년 4월 10일에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열린 최후의 선거였는데, 여러 후보가 나와 경쟁하는 정상적인 선거가 아니라 나치당 후보들의 명단들을 제시해놓고 이들의 의원직 취득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이 동의 여부를 묻는 단순한 예, 아니오식 선거였다. 다만 유대인들과 집시들은 투표에 허가받지 못했다.[16] 선거의 참여율은 99.5%로, 이들 중 98.9%가 나치당 의원들에게 동의한다는 평을 남겼다. 한편 히틀러의 본고장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경우, 전체 투표자들의 99.7%에 달하는 사람들이 나치당에 찬성표를 던졌다.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당과 독일 합병에 대하여 찬성을 표했으나, 특히 빈과 같은 대도시처럼 유대인들이 많았던 지역에서는 독일을 딱히 환영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서 숙원과도 같았던 독일과의 합병을 이루어낸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지지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었으며, 안슐루스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17]

    1938년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흡수된 직후부터 부유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이 재산을 강탈당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적으로 유대계 자본들을 강제로 뜯어오는 것이 허가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아이히만이 직접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 탄압을 감독했다. 빈의 시나고그에 살고 있는 유대인 가옥들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했으며, 오스트리아 남부에 있는 린츠,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등의 유대인들도 구속되거나 폭력의 대상자가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당시 벨기에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에 대하여 반대의 뜻을 밝히고 독일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등 오스트리아 왕실을 대표해서 독일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자, 독일 나치당은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지명수배하고 체포 즉시 사살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나치는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오츠마르크’로 개명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 전체 인구의 8% 밖에 되지 않았으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저명 인사들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칼텐부르너,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등이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인 것이다. 또한 나치 친위대의 13%가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18] 나치당 절멸수용소에서 일하던 직원들의 무려 40%가 오스트리아인들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당시 연합국 측의 공습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지방을 군수 공장의 집합소로 만들었으며 특히 유대계나 집시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어놓고 군용기나 탱크, 미사일 등을 제조하는 등에 활용하였다.

    물론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에 동조하는 자들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나치당에 반대하며 레지스탕스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저항 세력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게슈타포들에 의해 분쇄당했으며, 빈의 게슈타포 본부를 테러하는 내용의 계획도 게슈타포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저항군 측에서는 연합국 측에 군수 공장의 정보들을 넘겼다.[19] 이 저항군은 미국의 OSS와도 연이 닿아있었고, 아우슈비츠 등의 대규모 학살 등에 대한 정보들을 이들에게 폭로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 목표는 나치 독일이 최대한 일찍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독립 오스트리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패색이 명확해지고 점차 독일군은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모두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1945년 4월 13일에 나치 독일이 무너지기 직전에 빈이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한편 연합국 측에서는 ‘알프스 요새 작전’을 펼치며 동부 알프스에서 치고 들어올 것을 계획하였으나, 독일이 지나치게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이 무너지고 난 이후, 카를 레너와 오스트리아 사회당의 당수였던 아돌프 셰르프, 오스트리아 인민당의 당수였던 레오폴드 쿤스차크 등이 1945년 4월 27일에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레너 수상을 중심으로 소련과 스탈린의 후원을 받아 빈에서 임시 정부를 세웠다. 4월 말에 이르자, 오스트리아의 남서부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나치 치하에 있었다. 1945년 5월 1일에는 1934년 5월 1일에 돌푸스 수상에 의해 폐지된 이전 연방 헌법이 다시 되살려졌으며 다시 기존의 민주 오스트리아로 회복하는 작업이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총 사망자 수는 약 26만 명에 이르며,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피해는 약 65,000여 명에 이른다.[20] 1938년에서 1939년까지 무려 14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현대
     
    유엔 빈 사무국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비슷하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4개국으로 분할 통치되어 연합국 점령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국력의 차이가 있으며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을 선포한 점 등을 고려하여, 연합국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화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보수당과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되어 소련과 스탈린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권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나, 카를 레너 수상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아예 국가를 반으로 갈라 새로운 서구식 정부를 세우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연합국 측에서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침공당해서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1]

    1955년 5월 15일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획득해 내었고, 그해 연합국 군대가 모두 철수하고 난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의회에서는 ‘영구 중립국’ 결의안을 통과시켰고,[22] 이 날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국가기념일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를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워진 공화국과 구분하여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1920년과 1929년의 헌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1945년에 다시 한 번 개헌을 했다. 이 시기 이후로 오스트리아 정치는 2개의 정당이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고 있는데, 하나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고 나머지 하나가 오스트리아 국민당이다. 1945년 이래 단일 정권이 등장한 적은 1966-1970년의 국민당 정부, 1970-1983년의 사회민주당 정권, 이 2번 밖에 없었다. 나머지 시기의 경우에는 주로 대연정을 맺거나 다른 군소정당들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94년의 국민투표를 거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 1995년 1월 1일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23] 한편 오스트리아의 양대 정당인 오스트리아 국민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오스트리아의 군비 증강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현행 체계 유지를 원하는 반면, 중도우파 정당인 군비 증강을 통해 유럽의 군사 정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원한다. 현재 오스트리아는 유럽 연합을 통하여 평화유지 임무를 하고 있으며, NATO에도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 리히텐슈타인이 셍겐 조약에 가입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Johnson》. 19쪽.  《Johnson》. 21쪽.  《Lonnie Johnson》. 21쪽.  《Lonnie Johnson》. 23쪽.  《Lonnie Johnson》. 25쪽.  《Lonnie Johnson》. 26쪽.  Charles George Herbermann. 《" The Catholic encyclopedia"》.  《Lonnie Johnson》. 26-28쪽.  Vienna: Austrian Federal Press Service (2000). 《"Das politische System in Österreich (The Political System in Austria)"》.  Evan Burr Bukey. 《Hitler's Austria: Popular Sentiment in the Nazi Era》. 6쪽.  《Johnson》. 52-54쪽.  Shepard, Gordon (1996). 《The Austrians》. 161 William Street, New York City: Avalon Publishing Group Inc.  Mary Margaret Ball. 《Post-war German-Austrian Relations: The Anschluss Movement,》. 18-19쪽.  《Brook-Sheperd》. 28쪽.  《Lonnie Johnson》. 105쪽.  Robert Gellately (2001). 《Social Outsiders in Nazi Germany》. 26쪽.  Ian Kershaw (2001). 《Hitler 1936–1945: Nemesis》. 83쪽.  Art, David. 《The Politics of the Nazi Past in Germany and Austri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xiii–xiv쪽. ISBN 978-0-511-61614-3.  Strickhausen, Waltraud. 《Symposium “German-Speaking Exiles in Great Britain” in der University of Aberdeen, 24.–26. September 1990》. Berlin, Boston: DE GRUYTER SAUR. ISBN 978-3-11-095910-9.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Anschluss and World War II》.  《Lonnie Johnson》. 26쪽.  《Lonnie Johnson》. 105쪽.  《Brook-Sheperd》.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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