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da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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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 of 캐나다

캐나다(영어: Canada, 프랑스어: Canada 카나다[*])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연방 국가이다.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태평양, 북쪽으로는 북극해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약 998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며, 이는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크고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크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이 국경선이 무려 8,891km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간 국경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이며, 그 외에도 토론토, 몬트리올, 밴쿠버가 가장 거대한 도시들이다.

캐나다는 수천년간 캐나다 원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16세기 후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본격적인 캐나다 탐험을 시작하였고 17세기 중반 캐나다의 대서양 해안에 정착하였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양도하고 캐나다에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1867년, 영국령 캐나다가 연합하여 캐나다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영토의 증가가 가속화되었고, 지리적 영향과 이민국가로의 특성을 띄어 영국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대영제국 내 자치령이 되어 행정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1947년부터 캐나다 자치령에 거주하고 있는 대영제국 신민들은 캐나다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법권은 1949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캐나다 대법원으로 옮겨짐으로 독립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정식 국명을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캐나다는 정치적으로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1...더 보기

캐나다(영어: Canada, 프랑스어: Canada 카나다[*])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연방 국가이다.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태평양, 북쪽으로는 북극해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약 998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며, 이는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크고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크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이 국경선이 무려 8,891km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간 국경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이며, 그 외에도 토론토, 몬트리올, 밴쿠버가 가장 거대한 도시들이다.

캐나다는 수천년간 캐나다 원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16세기 후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본격적인 캐나다 탐험을 시작하였고 17세기 중반 캐나다의 대서양 해안에 정착하였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양도하고 캐나다에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1867년, 영국령 캐나다가 연합하여 캐나다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영토의 증가가 가속화되었고, 지리적 영향과 이민국가로의 특성을 띄어 영국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대영제국 내 자치령이 되어 행정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1947년부터 캐나다 자치령에 거주하고 있는 대영제국 신민들은 캐나다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법권은 1949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캐나다 대법원으로 옮겨짐으로 독립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정식 국명을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캐나다는 정치적으로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뤄진 연방 국가이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다. 국가원수는 국왕 찰스 3세(찰스 3세는 16개국의 국왕이다)이며, 캐나다 총독은 찰스 3세의 대리인이다.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캐나다는 G7, G20, 북대서양 조약 기구, OECD, WTO, 영연방, 프랑코포니, 미주 기구, APEC, 개발 원조 위원회, UN의 회원국이다. 한편, 2012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캐나다가 오스트레일리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2위로 선정되었다.

캐나다는 세계 최고 선진국들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도 18번째로 높은 1인당 명목 GDP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개발지수에서는 세계에서 16번째로 높다. 경제규모는 세계에서 10번째로 거대하며, 주로 풍부한 자원들과 국제무역을 통하여 엄청난 양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캐나다는 NATO,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 북미자유무역협정의 참여국이기도 하다.

More about 캐나다

Basic information
  • Currency 캐나다 달러
  • Native name Canada
  • Calling code +1
  • Internet domain .ca
  • Mains voltage 120V/60Hz
  • Democracy index 9.24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40000000
  • 영역 9984670
  • Driving side right
기록
  • 유럽인 도착 이전

    인류는 최소 약 14,000여 년 전부터 시베리아에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 현재 북아메리카와 캐나다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시기에 캐나다 지방에 정착한 고인디언(Paleo-Indian)들이 모여 살던 블루피시 동굴과 올드크로우 평원 등이 있다. 한편 빙하기가 끝나고 아프로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서로 이어주던 육로가 물에 잠기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인류는 고유한 문화를 꽃피워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영구 정착지들을 짓는 경우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었으며 수렵채집 생활을 계속하며 부락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유럽인 식민개척자들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상당수가 멸족하였고, 현재는 대부분을 고고학적 연구로만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캐나다에 도착하였을 때에, 캐나다에 모여 살던 토착 민족들의 수는 약 20만 명에서 2백만 명 사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개척 이후 토착민족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이전의 20% 수준으로 추락하였고, 대부분의 부락들이 사라졌다. 이들은 주로 유럽에서 옮겨온 인플루엔자,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들이나, 혹은 식민지 개척자들과의 무력 충돌, 그리고 백인 주도의 식민지 정부의 탄압 등으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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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 도착 이전

    인류는 최소 약 14,000여 년 전부터 시베리아에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 현재 북아메리카와 캐나다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시기에 캐나다 지방에 정착한 고인디언(Paleo-Indian)들이 모여 살던 블루피시 동굴과 올드크로우 평원 등이 있다. 한편 빙하기가 끝나고 아프로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서로 이어주던 육로가 물에 잠기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인류는 고유한 문화를 꽃피워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영구 정착지들을 짓는 경우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었으며 수렵채집 생활을 계속하며 부락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유럽인 식민개척자들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상당수가 멸족하였고, 현재는 대부분을 고고학적 연구로만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캐나다에 도착하였을 때에, 캐나다에 모여 살던 토착 민족들의 수는 약 20만 명에서 2백만 명 사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개척 이후 토착민족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이전의 20% 수준으로 추락하였고, 대부분의 부락들이 사라졌다. 이들은 주로 유럽에서 옮겨온 인플루엔자,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들이나, 혹은 식민지 개척자들과의 무력 충돌, 그리고 백인 주도의 식민지 정부의 탄압 등으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추정된다.

    다만 유럽인들과 토착민들 사이의 첫 만남이 항상 폭력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누이트족과의 첫 만남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편이었다.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혼혈인 메티스(Métis)들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게 협조하는 데에 일조하였고, 북아메리카 모피 무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 도시들을 세우는 데에도 원주민들이 도움을 주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다만 이후 유럽인들이 확고하게 캐나다 지역에 뿌리를 박고 세력을 어느 정도 구축해나간 이후에는, 토착 민족들은 강제적인 통합 정책으로 인하여 조상 대대로 살던 토지를 잃고 백인 사회에 흡수되어야만 했으며, 거부할 시에는 외지로 쫒겨나거나 때로는 사망하기도 하였다.

    식민 개척

    캐나다 해안을 처음으로 탐험한 유럽인은 바이킹 탐험가인 레이프 에릭슨이라고 추정된다.[1] 대략 기원후 1000년 즈음, 노르만족은 캐나다 지역을 탐험하고 소규모의 캠프를 차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소멸하였다. 이후 1497년까지는 그 어떠한 유럽인들도 캐나다를 탐험한 적이 없었는데, 1497년에 이탈리아 출신 잉글랜드 탐험가 존 캐벗(John Cabot)이 캐나다 동부 해안을 탐험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소유로 선포하였다.[2][3] 이 지역은 뉴펀들랜드라고 명명되었다. 1534년에는 프랑스의 탐험가인 자크 카르티에가 캐나다의 가스페 반도에 다다랐고, 그 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고 적힌 십자가를 꽃고 프랑스령을 선포하였다.[4][5] 16세기 초에 유럽인들이 포경업, 그리고 생선잡이를 위하여 대서양 연안 곳곳에 기지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본격적인 유럽인들의 교류가 행해졌다.

    1583년에 영국의 험프리 길버트 경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을 받아 임시 식민지인 세인트존을 세웠다.[6] 1600년에는 프랑스인들이 임시 무역거래소로 타두삭을 세웠고, 이후 프랑스인 탐험가들이 연이어 도착하며 1605년에는 포트 로얄을, 1608년에는 퀘벡을 세웠다.[7] 프랑스는 캐나다 지역에 상당한 관심을 쏟으며 프랑스인들을 지속적으로 북미 지역으로 보냈고, 이때 이들이 차지한 캐나다 동부 지역을 '아카디아(Arcadia)'라고 이름붙였다. 유럽인 개척자들은 이러한 식민도시들을 중심으로 점차 외곽으로 뻗어나갔고, 선교사들은 오대호와 미시시피 유역으로 포교를 나갔으며 모피 사냥꾼들도 비버와 같은 모피를 찾아 활발히 개척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17세기 중반에는 북미 모피 교역로를 두고 비버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은 1610년대부터 뉴펀들랜드에 추가적인 거주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미국이 있는 자리에 13개의 식민지들을 연달아 세웠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전세계의 식민지 주도권을 놓고 결국 7년 전쟁이 발발,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결국 영국이 캐나다 유역의 식민지를 이끌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노바 스코티아 지역은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령으로 귀속되었으며 1763년 즈음에 이르자, 캐나다 유역 거의 대부분이 영국의 통치 하에 놓였다.

    영국령 캐나다

    1763년 왕실 칙령으로 인하여 뉴프랑스 지역에 퀘벡 주가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세인트존 섬은 1769년에 독립적인 식민지 구역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아직도 프랑스인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기에 영국 식민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던 퀘벡 주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1774년 퀘벡 법을 제정하여 퀘벡 주의 영토를 오대호부터 오하이오 계곡까지 넓혔다. 또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남쪽에 있던 13개 식민지들과는 차원이 다른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해주었다. 영국 본국은 퀘벡 주에 프랑스어의 사용, 가톨릭의 종교의 자유와 가톨릭 신자의 공직 선출을 허용하고, 프랑스식 대륙법 문화와 프랑스 민법의 적용을 인정하였으며,[8][9][10][11] 이 덕분에 퀘벡의 분리독립 운동은 이전보다 훨씬 가라앉았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남쪽에 있던 13개의 식민지들에게는 불공평해보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격분한 13개 식민지들의 대표들은 독립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 혁명이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이 영국 군대를 성공적으로 몰아낸 이후,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신생 미합중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영국으로부터 오대호 남쪽의 영토와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이후 미국에 있던 왕당파, 그리고 영국 충성파 인사들은 대다수가 미국을 떠나 캐나다의 대서양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의 갑작스런 유입은 캐나다의 인구 구성까지 바꿔놓으며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프랑스권이 주류였던 퀘벡 지역에 대대적으로 몰려오자, 영국 정부에서는 이들과 프랑스계 주민들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1791년 퀘벡 법을 제정하여 세인트로렌스강 하류 지역을 프랑스어권인 로어 캐나다(Lower Canada)로, 상류 지역을 영어권인 어퍼 캐나다(Upper Canada)로 나누어 각자 의회를 설치하고 자치하도록 만들었다.

    1815년에 독립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고 다시 미대륙에 평화가 찾아오자, 더 많은 영국인들이 캐나다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1815년과 1850년 사이에 약 96만 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이 대서양을 건너왔으며, 이들 중에서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온 난민들과 잉글랜드의 탄압을 피해 도망쳐온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려오자, 당연히 위생상태는 악화될 수 밖에 없었고 전염병이 빈번하여 1891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온 유럽인들의 25%에서 33% 정도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출처 필요]

    캐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질수록, 캐나다인들은 자치적인 통합 정부를 갖기를 원했고 결국 1837년에는 영국을 상대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이를 무마하고 프랑스계 백인들을 영국계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하여 캐나다 자치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한다. 1840년 연합법의 통과로 인하여 1849년까지 캐나다 전역이 하나의 정부의 통치를 받게 하도록 하는 구상이 영국 의회를 통과했고, 영국은 미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어 캐묵은 미국과의 국경 분쟁을 끝냈으며 북위 49도 선을 국경으로 삼아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이후에도 영국은 밴쿠버섬과 브리티시컬럼비아를 개척, 식민지로 삼았다. 1867년에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면서 캐나다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해버리려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국가간의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팽창
     
    1867년 이후로 캐나다의 행정 구역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

    1867년 7월 1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British North America Acts)을 통하여 온타리오, 퀘벡, 노바 스코티아, 뉴브런스윅, 이 4개의 주가 합쳐져 공식적으로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설립되었는데, 이를 캐나다 연방(Canadian Confederation)이라고 한다. 각 주는 사법부를 선출하였고 교육과 보건 등에 자치권을 행사했다. 신생 캐나다 정부는 설립 직후 곧바로 루퍼츠랜드를 북서부의 영토로 합쳐 북서부 영토를 설립하였으며, 1870년 7월에 마니토바 주를 새롭게 만들었다. 1866년에 합쳐져 있던 브리티시컬럼비아와 밴쿠버 섬은 1871년에 캐나다 자치령에 포함되었고, 프린스에드워드 섬은 1873년에 캐나다에 가입했다. 1898년에는 금광을 찾아 북서부 지역으로 수많은 백인 광부들이 골드러시를 떠났고, 이에 북서부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유콘 준주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1871년과 1896년, 캐나다 인구의 4분의 1이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남쪽으로 이민을 갔다.

    캐나다 정부는 낙후된 서부 지방을 개발하고 유럽인 이주를 장려하기 위하여 3개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본격화했다. 당시 철도 건설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이들은 중국에서 온 1만 5천여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을 향한 차별은 분리정책과 임금차별 등 이들의 이주 초기부터 철도 완공 후 인두세 부과(Chinese head tax in Canada) 등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된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정부에 따르면 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만 투입된 9000명의 인력 중 6500명이 중국 이주노동자들이었는데, 백인 노동자들이 하루 1.5달러에서 2.5달러의 임금을 받으며 식사와 장비를 제공 받을 때 이들은 하루 1달러를 받으며 식사와 장비를 본인들이 사야 했고 폭파와 같은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만 수백 명의 중국 이주노동자들이 건설 노동 중 사고, 추운 겨울,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12] 2006년 연방정부는 차별적 인두세 정책에 대해 사과했다.[13]

    캐나다 정부는 또한 개척자들의 토지 획득을 장려했고 경찰 조직을 신설하여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때 수많은 백인들이 서부 지역으로 건너갔고, 이 때문에 많은 토착 민족들이 거주지를 잃고 강제로 내쫒기거나 ‘보호구역’으로 끌려갔다. 또한 백인 사냥꾼들의 무분별한 사냥으로 한때 미대륙 전역에 있던 아메리카 들소가 멸종당했으며, 이들의 빈자리를 유럽식 소 농장과 밀 농장이 채웠다. 한편 원주민들은 유럽발 전염병, 토지 상실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캐나다 정부는 이들이 보호구역으로 옮겨가는 조건으로 인도적 지원을 했다. 이 시기 캐나다 정부는 ‘인디안 법’을 제정하여 이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정부 주도 교육을 강화하여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신생 캐나다 정부가 설립되었다고는 했어도,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법에 따라 영국은 여전히 캐나다의 외교권을 쥐고 있었다. 이 때문에 캐나다는 자동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수 밖에 없었다. 캐나다의 자원병들은 곧바로 서부 전선으로 투입되었으며, 비미 리지(Vimi Ridge) 전투 등 여러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략 625,000여 명의 군인들이 유럽으로 파병되었으며, 이들 중 6만 명이 전사하였고 172,000 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캐나다인들이 유럽의 전쟁에서 전사하며 캐나다 내에서 회의론이 커지던 중, 친영파 내각이 병사 부족을 근거로 징병령을 추진하자 국민들은 특히 프랑스어권 퀘벡을 중심으로 이에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프랑스계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영국계에 비하여 차별을 받고 있었다 느꼈고, 영국에 대한 애국심도 약했기에 참전을 꺼릴 수 밖에 없던 것이다. 한편 1919년에 캐나다는 영국과는 독자적으로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고, 1931년의 웨스터민스터 헌장을 통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캐나다는 1930년대 초의 대공황으로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많은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자, 정부가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이념이 40년대와 50년대에 주류로 떠오르며 현대적 ‘복지 국가’의 개념이 대두되었다. 한편 1939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라이언 메켄지 킹이 9월 10일에 나치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로 인하여 캐나다의 독립 행보가 잠시 주춤하였다.

    1939년에는 첫 캐나다 파병대가 영국에 도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캐나다인들이 참전하였으며, 대략 42,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55,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캐나다 군인들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노르망디 전투, 이탈리아 침공, 스헬더 전투 등에서 활약을 펼쳤다. 또한 나치 독일군을 피해 피난을 온 네덜란드 왕가에게 망명지를 제공하였으며,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해방을 도와준 은인국가로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세계 대전기 동안 캐나다, 영국, 중화민국, 소련 등 참전국들에게 판매할 군수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캐나다 경제는 전폭적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비록 1944년에 퀘벡에서 또다시 징병 논란이 불거지기는 하였으나, 전쟁이 끝날 때쯤의 캐나다는 강한 군대와 경제를 갖고 있는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연방정부는 서부 연안에서부터 100마일(약 160km) 이내에 살고 있는 재캐나다 일본인과 일본계 캐나다인 2만 1천여 명(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살던 일본계 캐나다인 중 90 퍼센트를 초과)을 감금하고 어떠한 보상도 없이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매각했다. 이들은 전시조치법(War Measures Act)에 의해 구금되었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억류되었다. 이들은 내륙에 있는 수용소로 강제이주 당했는데, 성인 남성들은 가족과 분리되어 도로 건설에 투입되거나 가족과 함께 알버타 주와 매니토바 주에 있는 사탕무 농장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받았다. 강제이주를 거부하는 이들은 포로소용소로 보내졌다. 이 조치는 캐나다 군과 캐나다 연방경찰(RCMP)의 일본계 캐나다인들은 캐나다에 위험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다. 일본계 캐나다인의 투표권은 1948년이 되어서야 복권되었다. 1998년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는 캐나다 정부를 대표해 일본계 캐나다인들에게 행해진 잘못을 사과했고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시조치법을 폐지했다.[11][14]

     
    쥐스탱 트뤼도 총리
    현대

    대공황의 여파로 캐나다의 경제가 휘청거리자, 뉴펀들랜드는 자치 정부를 포기하고 1934년에 영국 총독의 지배를 받는 왕실령 식민지로 귀속되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2번의 국민투표를 거친 후, 뉴펀들랜드의 주민들은 1949년에 캐나다의 한 주의 자격으로 캐나다에 포함되는 것을 선택하였다.

    캐나다는 전후 연달아 자유주의 내각이 집권하면서 캐나다만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갔다. 1965년에는 현재의 메이플리프 깃발을 새로운 국기로 채택하였으며, 1969년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공식적인 국어로 삼았고 1971년에는 다문화주의를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복지정책, 연금정책, 학자금 대출 등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도 이 때 중심으로 다수 시행되었다. 다만 퀘벡 주나 알베타 주 등 이러한 정책들이 행정권 남용이라 하여 심하게 반발하는 주들도 일부 있었다.

    1982년에는 영국에서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을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캐나다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게 되었다. 또한 ‘캐나다 인권과 자유 헌장’(Canadian Charter of Rights and Freedoms)이 채택되기도 했다. 캐나다는 엘리자베스 2세를 여전히 국가원수로 두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1999년에는 누나부트가 캐나다의 3번째 준주로 편입되었다. 같은 시기,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던 퀘벡에서는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이라 하여 격한 세속주의화, 국민주의화가 일어나며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났다. 급진적인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은 1970년대에 납치와 테러를 일삼으며 퀘벡 독립을 추구했고, 의회에도 진입하며 1980년에 독립 주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분리 독립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퀘벡 분리주의 운동은 급진적인 방향에서 선회하여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투표를 통한 독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1995년에 또다시 시행한 주민투표에서 50.6대 49.4로 아슬아슬하게 또다시 독립이 불발되었다. 1997년에 캐나다 대법원은 퀘벡 주와 같은 선례를 막기 위하여 연방으로부터 함부로 탈퇴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을 승인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는 퀘벡 독립운동 외에도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으로 1985년에 일어난 캐나다 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낸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1989년의 대학 총기 난사 사건, 원주민들과 캐나다 정부 사이의 갈등이 터진 오카 사건 등이 있다. 캐나다는 1990년에 걸프 전쟁에 미국 주도 연합군으로 참전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평화유지군 임무에도 참가하였다. 캐나다는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2003년의 이라크 전쟁 참전은 거부하였다. 2011년에 캐나다 군대는 나토 주도의 리비아 전쟁에도 참여하였고, 2010년대 중반에는 이슬람 급진 테러단체인 IS와도 전투를 벌였다. 2020년대에는 중국 우한에서 발원한 코로나 19가 전세계적으로 퍼졌고, 캐나다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네이버 지식백과] 새로운 어장을 찾아서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8. 20., 마이클 우드, 피터 퍼타도, 박누리, 김희진).....500년 전 이미 노르웨이의 모험가 레이브 에릭손이 그린란드를 떠나 북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뉴펀들랜드에 그리 오래 가지 않은 정착지를 세웠었다. 그러나 캐벗의 발견이야말로 캐나다와 북아메리카 역사에서 잉글랜드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 첫걸음이었다. 최희일 <한 권으로 보는 캐나다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1년 p35 진 프리츠 <삐딱하고 재미있는 세계 탐험이야기> 푸른숲 2003 p112 최희일 <한 권으로 보는 캐나다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1년 p35 ~ 38 [네이버 지식백과] 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세인트존스 [Saint John's] (두산백과) 최희일 <한 권으로 보는 캐나다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1년 p40 ~ 41 Britannica (2016년 7월 12일). “Quebec Act”. 《Britannica》. 2021년 3월 17일에 확인함.  Compendium of Language Management in Canada (n.d.). “Quebec Act (1774)”. 《University of Ottawa》. 2021년 3월 17일에 확인함.  Dagenais, Maxime; 외. (2020년 5월 11일). “Quebec Act, 1774”. 《The Canadian Encyclopedia》. 2021년 3월 17일에 확인함.  ↑ 가 나 Government of Canada (n.d.). “Discover Canada - Canada's History”. 2021년 3월 16일에 확인함.  Government of British Columbia. “Building the Railway”. 《Government of British Columbia》. 2021년 3월 14일에 확인함.  Government of Canada (2006년 6월 22일). “Prime Minister Harper Offers Full Apology for the Chinese Head Tax”. 《Government of Canada》. 2021년 3월 14일에 확인함.  Marsh, James H. (2012-02-23; 2020-09-17). “Japanese Canadian Internment: Prisoners in their own Country”. 《The Canadian Encyclopedia》. Historica Canada. 2021년 3월 16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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