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xt of 브라질

브라질 연방공화국(브라질 포르투갈어: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 헤푸블리카 페데라치바 두 브라지우, 문화어: 브라질 련방공화국), 줄여서 브라질(브라질 포르투갈어: Brasil 브라지우)은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제 공화국이다.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면적이 넓고 인구도 2억 1천만 명이 넘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수도는 브라질리아이고, 최대 도시는 상파울루이다. 26개의 주와 1개의 연방구로 이루어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포르투갈어가 공식 언어인 유일한 국가이며,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국가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민족적 다양성이 가장 극대화된 나라들 중 하나로 손꼽히며,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이민자들로 인하여 문화도 굉장히 풍부하다. 로마 가톨릭 신자의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More about 브라질

Basic information
  • Currency 브라질 헤알
  • Native name Brasil
  • Calling code +55
  • Internet domain .br
  • Mains voltage 220V/60Hz
  • Democracy index 6.92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203062512
  • 영역 8515767
  • Driving side right
기록
  • 명칭 유래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어로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이며, 공식적인 영어 표기는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이다. 포르투갈어로 "Brasil"라고 표기하지만, 영어로는“Brazil”라고 표기를 한다. 그러나 수도 브라질리아는 포르투갈어인 “Brasília”로 표기한다.

    ‘브라질’이라는 이름은 브라질나무에서 비롯하였다. 브라질나무는 붉은 색 염료로 쓰이는 나무로, ‘불타는 숯처럼 붉은 나무’라는 뜻의 ‘파우 브라질(pau-brasi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지역에서 브라질나무를 활발하게 수출하면서 유럽에서는 이 지역을 ‘브라질의 땅(Terra do Brasil)’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아라부탄'이라고 부르는 나무의 붉은 수액이 염료로서 귀중하게 취급되었기에 '브라지레(타오르는 불꽃 같은)'라고 형용했다. 이 브라지레가 현재의 국명 '브라질'의 유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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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유래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어로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이며, 공식적인 영어 표기는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이다. 포르투갈어로 "Brasil"라고 표기하지만, 영어로는“Brazil”라고 표기를 한다. 그러나 수도 브라질리아는 포르투갈어인 “Brasília”로 표기한다.

    ‘브라질’이라는 이름은 브라질나무에서 비롯하였다. 브라질나무는 붉은 색 염료로 쓰이는 나무로, ‘불타는 숯처럼 붉은 나무’라는 뜻의 ‘파우 브라질(pau-brasi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지역에서 브라질나무를 활발하게 수출하면서 유럽에서는 이 지역을 ‘브라질의 땅(Terra do Brasil)’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아라부탄'이라고 부르는 나무의 붉은 수액이 염료로서 귀중하게 취급되었기에 '브라지레(타오르는 불꽃 같은)'라고 형용했다. 이 브라지레가 현재의 국명 '브라질'의 유래가 되었다.

    처음 1500년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상륙했을 때에는 남미 대륙 일부가 아니라 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라크루즈 (진정한 십자가) 섬"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마누엘 1세 시대에 "산타크루스(성스러운 십자가)의 땅"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브라질’이라는 이름을 선호했고, 16세기에 브라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콜럼버스 이전기
     
    브라질 인디오

    브라질 최초의 주민은 BC 11,000년에 베링해를 건너서 아시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8000년경 현재 브라질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현재 브라질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잉카의 권위는 여기까지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원시적인 농경을 영위했다. 이후 유럽인들이 인디오라고 부른 투피-과라니계 원주민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16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원주민들이 해안 지역에만 100만명에서 200만명으로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도래할 때까지는 브라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브라질 원주민은 투피어계 외에 알아크어계, 카리브어계 집단이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투피 어계 원주민이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은 투피어 원주민 말이 브라질의 근본이라고 오해했고, 원주민은 각 지파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그 말을 가르쳤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후, 이미 발견된 아메리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브라질도 식민지화의 위협에 노출됐다. 1500년에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한 이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다른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역사를 걷게 되었다. 초기 브라질에서는 기독교도로 개종한 이들에 의해 파우 브라질의 수출이 주요 산업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처음에 베라크루즈 섬으로 불렸던 브라질은 16세기에 들어서 브라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549년에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초대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데 수자가 사우바도르에 부임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연합하자 브라질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공격을 받아 북동부의 일부가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점령되었다. 네덜란드는 1661년 철수하였다. 한편, 파우 브라질이 고갈된 이후 새로운 산업으로 북동부에 마데이라 제도에서 사탕수수가 도입되어 엔제뇨(설탕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먼저 인디오가 노예화된 후 인디오의 수가 부족하자 서부와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흑인 노예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포르투갈 농장주의 파젠다(농장)에서 혹사를 당했다.

     
    전 인종의 흑인지도자 즘비

    브라질 내륙의 탐험은 상파울루의 반데이란테(노예사냥 탐험대)에 의해 17세기에 시작되었다. 반데이란테는 각지에 원정하여 현재 도시의 기반이 되는 마을을 많이 세웠지만, 남부와 파라과이까지 원정하여 예수회가 보호되고 있던 과라니 사람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런 가운데 힘든 강제노동에 참다못한 흑인 노예 중에는 브라질 오지로 도망쳐 주거지를 형성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주거지들을 ‘모캄보’나 ‘킬롬보’라고 불렀고, 이곳에서 아프리카 흑인들뿐만 아니라 인디오 원주민들도 있었다. 이러한 킬롬보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는 오늘 날의 알라고아스주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강가 즘바’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이후 그의 후계자인 ‘즘비’가 통치를 하였다. 이후 네덜란드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여러 차례 팔마레스를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1695년 유명한 사오 파울로 출신의 도밍고스 조르제 벨호가 가까스로 킬롬보 공략에 성공하여 즘비를 죽이고 이곳을 정복했다.

    1680년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라플라타강 하구 좌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너편에 콜로니아 데 세크라멘토를 건설했기 때문에 이후 반다 오리엔탈 지역은 독립 이후까지 계속되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권력 사이에 충돌의 장이 되었다. 또한, 남부에서는 라플라타 지역의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가우초라는 목동 집단이 생겨났다.

    이후 18세기에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골드 러시가 일어나, 브라질의 중심이 북동부에서 남서부로 이동하여 1763년 리우데자네이루가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다. 금광은 18세기 동안에 무려 30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였고,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더 많은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다. 한편 미나스의 중심지가 되었던 오루프레투(Ouro Preto)에서는 독창적인 바로크 문화가 번창했다. 반다 오리엔탈을 둘러싼 스페인과 충돌 후 18세기 말에는 계몽주의가 유럽에서 전해지면서,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의 영향을 받아 1789년 포르투갈에서 독립을 하려 했던 "미나스의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인 치라덴테스가 처형되었다. 이후 아이티 혁명의 영향을 받아 크리올 백인이나 물라토, 크레올 흑인(크레올로)에 의한 독립 운동이 진행되지만, 식민지 시대에 브라질에 대학이 설립되지 않은 등 지적 환경의 부족은 브라질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일부 지식인의 "음모"에 머물렀고, 대중적인 기반을 가진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는 브라질과 이스파노 아메리카 국가 독립의 정체성 차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라질의 독립

    반도 전쟁은 1807년 장 주노(Jean-Andoche Junot)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 왕가는 리스본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하였고, 이후 리우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1815년 리우데자네이로는 브라질과 포르투갈 및 알가브레 연합알가르베 연합 왕국]]의 수도로 결정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반다 오리엔탈의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이끄는 연방 동맹과 전투를 통해 반다 오리엔탈을 지배하였으며, 정복한 지역에 시스플라티나 주(Cisplatina)를 설립했다. 1820년 포르투갈을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국으로 변혁하려는 혁명이 일어나자,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앙 6세가 귀국을 요청했다. 1821년 포르투갈 왕궁은 리스본으로 귀환했지만, 섭정으로 잔류한 브라간사 왕가의 황태자 페드루를 죠제 보니파시오를 대표하는 브라질인 세력이 지지하여, 1822년 9월 7일에 페드루는 황제인 페드루 1세(재위 1823-1831)에 즉위하여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제정 시대
     
    페드루 2세

    브라질의 독립은 브라간사 왕가의 황제라는 구심력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 미겔 이달고 등이 주장하는 공화제와 입헌군주제의 사상이 충돌하지 않았다. 이스파노 아메리카 국가가 분열하는 것과 달리 광대한 브라질 식민지 단일 단위로 새로운 주권 국가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 계층이 독립 후에도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정 시대는 처음부터 각 지방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과 공화제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1820년대 북동부 페르남부쿠주에서는 적도 연맹의 반란이 일어났고, 최남단의 시스플라티나 주에서는 오리엔탈 주의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복귀를 요구한 33명의 오리엔탈 주 사람이 잠입하여 시스플라티나 주를 둘러싸고 시스플라티나 전쟁이 발발했다. 시스플라티나 주는 영국의 중재에 의해 1828년에 우루과이 오리엔탈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831년 페드루 1세가 퇴위하면서 지방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고, 최남단의 히우그란지두술 주에서 목장 주와 가우초가 반란을 일으켜 파라포스 전쟁이 발발했다. 1840년 페드루 2세 (브라질)가 즉위하면서 사태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며, 1848년 프라이에이라의 반란을 진압한 후, 브라질 사상 최초의 안정기가 찾아왔다. 페드루 2세는 영토 야심을 가지고 있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 개입하여, 그 결과 1864년에 파라과이의 시스코 소라노 로페즈 대통령은 브라질에 선전포고하여 파라과이 전쟁이 일어났지만, 카시아스 공이 이끄는 브라질 제국이 주체가 된 삼국동맹군은 파라과이를 격파했다.

     
    1888년 브라질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 한 법.

    한편, 독립 후에도 대농장의 의해 노예제도가 계속 유지되었지만, 미국의 남북 전쟁 후 서반구에서 노예제도를 채택한 독립 국가는 브라질 제국만 남았기 때문에 삼국동맹 전쟁 이후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에 의해 노예제도는 비판을 받았다. 삼국동맹 전쟁 이후 제도적으로 확립된 군의 청년장교(테넨테)들은 실증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점차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와 제정의 폐지를 포함한 국민운동이 싹텄다. 이 운동은 1888년으로 《황금법》이 공포되면서 서반구에서 마지막까지 유지되었던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페드루 2세는 노예제도의 폐지로 인해 대농장의 지원도 잃었고, 다음해 1889년 데오도로 다 폰세카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제정이 붕괴되었다.

    구 공화국 시대

    1889년에 일어난 공화제 혁명으로 브라질 제국은 공화제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에는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밀크커피)라고 불렸던 커피재배가 주된 산업인 상파울루주와 목축업을 기반으로한 미나스제라이스주가 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관행이 생겼다. 또한 제정 시대부터 커피, 농장에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노예제 폐지 후 이민자의 유입 속도가 더욱 빨라져, 1908년에는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일본인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제출한 인종차별 철폐 방안에 찬성하는 등 인종차별 철폐에 적극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후, 1920년대에는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대한 비판이 높아져,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테스를 비롯한 테넨테(청년 장교)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했다. 이 테넨치즈모가 직접 국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1930년대의 정치 상황을 마련하게 했다..

    바르가스 시대

    1930년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대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1930년 혁명을 일으켜, 독재 정치를 확립하려 했다. 1932년에는 상파울루 주 반 바르가스 세력에 의해 호헌 혁명이 발발하였고, 이 반란을 진압한 바르가스는 브라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7년 바르가스는 쿠데타에 의해 이탈리아 파시즘에 영향을 받은 이스타두 노부(신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바르가스 시대에는 대학의 정비, 국가 주도의 공업화, 민족주의의 추진과 이민자 동화 정책,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이 진행되었다. 1942년에 바르가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지만,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국민과 군 내부에서 강해져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5년 10월 13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다.

    포퓰리즘의 시대
     
    브라질리아 대성당

    1946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이후 1950년 브라질 최초의 민주 선거를 통해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두 번째 집권한 바르가스는 파시즘 색상보다 좌파 포퓰리즘 색깔을 내세워 브라질 경제의 국민화가 진행되었지만, 군의 저항으로 바르가스는 1954년에 자살했다. 1956년 취임한 쥬세리노 쿠비세키 대통령은 “50년 발전을 5년에”라는 공약을 내걸고 개발 정책을 추진하여, 내륙의 고이아스 주에 새로운 수도 브라질리아를 건설한 후 1960년 리루데자네이로에서 수도를 옮겨왔다. 그러나 이 개발 정책으로 발생한 부채가 재정을 압박하여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다. 1961년 취임한 존 베우키오루 마르케스 골라르트 (일명 장고) 대통령은 이 같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1964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군사 독재 시대

    1964년 쿠데타를 일으킨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은 군사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친미반공 정책과 외국 자본의 도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군정의 시대는 "브라질의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의 고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지만,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경제 성장은 추락하고, 소득 격차의 증가로 인해 범죄 발생 비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또한 군사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그동안 각지에서 카를로스 마리게라의 민족해방행동(ALN)과 10월 8일 혁명운동 등 도시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외국대사를 납치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친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4년 대통령에 취임한 에르네스투 게이세우 장군은 국민적인 불만이 팽배해지자, 군정의 노선 전환했고, 1979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주앙 피게이레두는 민정 이관을 공약했다. 1985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탄크레두 네베스가 승리했다.

    민정 이후

    1985년에 민정 이양을 하고 문민 정권이 부활했지만, 탄크레두 네베스가 급사했기 때문에 부통령이었던 조제 사르네이가 대통령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로 인해 경제는 악화되었고, 사르네이 정권은 국내에서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라울 알폰신 정권 하의 아르헨티나와의 관계가 이 시기에 크게 개선되었고, 오랫동안 계속된 양국의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0년 국가재건당 후보인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경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해 수많은 부패와 각종 기행을 남기고, 1992년에 파면되었다. 부통령 이타마르 프랑쿠가 이어받은 후 1995년 브라질 사회민주당에서 취임한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정권 하에서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는 같은 해 메르코수르(남미 공동 시장)를 발족했다.

    2003년 노동자당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취임 이후 세계 경제의 호조를 바탕으로 경제를 회복하였다. 룰라는 두 번의 연임을 했고, 2010년 10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국무부 장관이 당선됐다. 지우마 호세프는 2011년 1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14년 대선 때 재선의 성공하였으나, 2016년 5월 12일에 대통령의 직무 활동이 정지되었으며, 동년 8월 31일에 탄핵되었다. 이후 미셰우 테메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좌파 정권에서 우파 정권으로 교체되었으나, 2018년 선거에서 결선 투표 끝에 노동자당의 페르난두 아다지가 사회자유당의 자이르 보우소나루에게 패배하여 낙선을 하였고 이로써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후보인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이 되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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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rasebook

안녕하십니까
Olá
세계
Mundo
안녕하세요 세계
Olá Mundo
고맙습니다
obrigada
안녕
Ad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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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있나요?
Como você está?
좋아, 고마워
Tudo bem, obrigado
얼마예요?
Quanto isso cu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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