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chén Itzá

( 치첸이트사 )

치첸이트사(스페인어: Chichén Itzá 치첸이트사[*]) 혹은 치첸이차(유카텍 마야어: Chiʼchʼèen Ìitshaʼ 치첸이차)는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위치한 마야 문명의 도시이다.

치첸이트사는 북부 마야 저지의 주요 유적들 가운데 하나로, 마야 고전기 후기(AD 600 - 900)에 지어졌다. 다만 몇 백년에 걸쳐 지어진 도시이기에, 후기 마야 시대(AD 900 - 1200)의 초기 건축 양식풍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치첸이트사에서는 중앙 멕시코 지역의 건축풍에서부터 북부 마야 저지대 건축풍에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섞여있다. 초기 고고학계는 이와 같은 비-마야적 건축양식들이 타 지방에서 쳐들어온 정복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나, 나중에 연구가 거듭됨에 따라 현재는 문화 전파에 의하여 이러한 타 지방의 양식들이 자연스레 마야 도시에 섞여들어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치첸이트사는 마야 문명의 도시들 중 가장 거대한 규모였으며, 이 때문에 후기 메소아메리카 문학에서 '잊혀진 신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의 영광을 자랑했다. 최고 전성기 당시 치첸이트사는 마야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 지방들과 교역도 대단히 활발했다. 치첸이트사에 있는 다양한 건축양식들은 이와 같은 문화교류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치첸이트사 유적은 국유이며, 유적의 관리권은 멕시코 국립 인류학 역사 학회(National Institute of Anthropology and History)이 소유하고 있다. 다만 몇몇 신전들의 소재지는 사유지였으나, 2010년에 유카탄 주에서 이를 모두 사들였다.

치첸이트사는 멕시코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유적지로, 2017년 기준 26...더 보기

치첸이트사(스페인어: Chichén Itzá 치첸이트사[*]) 혹은 치첸이차(유카텍 마야어: Chiʼchʼèen Ìitshaʼ 치첸이차)는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위치한 마야 문명의 도시이다.

치첸이트사는 북부 마야 저지의 주요 유적들 가운데 하나로, 마야 고전기 후기(AD 600 - 900)에 지어졌다. 다만 몇 백년에 걸쳐 지어진 도시이기에, 후기 마야 시대(AD 900 - 1200)의 초기 건축 양식풍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치첸이트사에서는 중앙 멕시코 지역의 건축풍에서부터 북부 마야 저지대 건축풍에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섞여있다. 초기 고고학계는 이와 같은 비-마야적 건축양식들이 타 지방에서 쳐들어온 정복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나, 나중에 연구가 거듭됨에 따라 현재는 문화 전파에 의하여 이러한 타 지방의 양식들이 자연스레 마야 도시에 섞여들어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치첸이트사는 마야 문명의 도시들 중 가장 거대한 규모였으며, 이 때문에 후기 메소아메리카 문학에서 '잊혀진 신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의 영광을 자랑했다. 최고 전성기 당시 치첸이트사는 마야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 지방들과 교역도 대단히 활발했다. 치첸이트사에 있는 다양한 건축양식들은 이와 같은 문화교류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치첸이트사 유적은 국유이며, 유적의 관리권은 멕시코 국립 인류학 역사 학회(National Institute of Anthropology and History)이 소유하고 있다. 다만 몇몇 신전들의 소재지는 사유지였으나, 2010년에 유카탄 주에서 이를 모두 사들였다.

치첸이트사는 멕시코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유적지로, 2017년 기준 260만 명이 이 곳을 다녀갔다.

 엘 카스티요 내부의 재규어 왕좌

치첸이트사의 초기 구조는 약 기원후 750년과 900년 사이에 대부분 만들어졌다. 다만 최종적인 기본 구조는 기원후 900년 경 이후에 대부분 확립되었다. 10세기에는 치첸이트사가 전성기에 다다라 유카탄반도 중부에서 북부 해안지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으로 떠올랐으며, 그 영향력을 반도의 동부, 남부 해안 지대까지 뻗쳤다. 치첸이트사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는 약 기원후 832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상형문자는 99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건설

초기 치첸이트사는 현재 츠톨록 세노테(석회암 구조에 생기는 자연 우물)의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 만들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나중에 도시가 증축되며 파괴되었기에, 라스 몬자스와 천문대의 기반 구조에서나 겨우 그 풍을 찾아볼 수 있다.

발전

치첸이트사는 마야 초기 고전기(AD 600년)에 크게 발전하여, 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후 후기 고전기와 고전기 말기에는 유카탄반도 저지대 북부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변 지방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중심이 되었다. 다만 치첸이트사의 발전은 동시에 쇠퇴와도 연관이 되어있었으며, 특히 저지대 남부 지방의 강력한 도시들이 퇴락하기 시작하며 이 쇠퇴 속도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치첸이트사가 크게 떠오르자, 치첸이트사 남쪽에 있던 도시 약스나(Yaxuna)와 동쪽에 자리잡은 도시 코바(Coba)는 동시에 쇠퇴하였다. 당시 약스나는 코바에게 경제적, 정치적으로 의존하며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구조였는데, 10세기 이후 코바가 몰락하고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자, 약스나도 이에 따라 망국의 길을 걸었다. 다만 치첸이트사가 코바와 약스나의 멸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설도 힘을 얻고 있다.

쇠퇴

식민지 시대에 발견된 마야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마야판의 지도자였던 후낙 크레엘(Huanc Ceel)이 13세기에 치첸이트사를 점령하였다고 밝혔다. 당시 후낙 크레엘은 자신이 권력을 잡을 것을 스스로 예언했다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한 특정한 깊은 우물 속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 땅 밖으로 올라온 사람은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다만 그 때까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에 이 설을 입증할 생존자는 없었던 형편이었다. 후낙 크레엘은 자신이 처음으로 이 우물 속에서 살아나올 사람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고, 결국 우물 속에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와 자신이 권력을 가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사람들은 후낙 크레엘이 예언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기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치첸이트사가 대규모로 약탈되었다는 증거는 도시 곳곳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이 약탈이 위의 내용처럼 마야판 군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데, 이는 마야판의 최전성기 당시 이미 치첸이트사는 옛 영광을 잃어버리고 몰락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약탈 흔적들은 대부분 1100년대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이는 마야판이 발흥하기 전 시대이라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치첸이트사가 1100년대에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마야판에서 추가적으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질 경우 이에 대한 추가적인 학설이 나올 것으로 추정된다.

치첸이트사의 주 지배층이 몰락하고 거의 대부분의 도시 활동이 중단된 후에도 얼마 동안 치첸이트사에는 상당히 작은 규모의 인원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했을 무렵 치첸이트사에는 여전히 몇몇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다만 이 주민들이 치첸이트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치첸이트사 주변의 소규모 마을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여전히 치첸이트사 지역은 타 지방들에 비해 그 인구가 훨씬 많은 지역이었기에, 스페인 정부는 이 곳에 수도를 짓고 원주민들을 다스렸으며, 이후 식민지 시대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한동안 순례 중심지로 번성했다.

스페인 정복기

1526년에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데 몬테조(코르테스 원정에 참여했던 군인)는 스페인 국왕에게 탄원을 넣어 자신이 유카탄반도를 정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얼마 안 있어 국왕의 허가를 받았다. 그의 첫 원정은 1527년에 시작되었고, 이때 유카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후 그는 현재의 칸쿤에 작은 요새 도시를 세워 식민화했고, 1531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서부 해안 캄페체 주에 대대적인 본진을 세웠다. 그는 그의 아들을 파견하여 유카탄반도의 점령을 확실하게 하도록 명령하였고, 당시의 목표는 치첸이트사를 완벽히 점령하여 그 곳에 식민지의 새 수도를 세우는 일이었다.

몬테조의 아들은 치첸이트사에 도착한 직후 그 곳을 치우다드 레알(Ciudad Real)로 개명했다. 식민지 작업 초기에 스페인 군대는 원주민들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스페인인들이 점차 도시와 주변 땅을 갈라 군사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벽을 치고 출입을 제한하자 원주민들의 분노는 점차 커져갔다. 이후 원주민들은 그들을 공격했고 해안 쪽의 보급선을 끊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스페인 군대는 치첸이트사의 폐허 속에서 공성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고, 몬테조의 아들은 몇 달을 도움을 기다리며 이 안에서 버텼으나 아무런 지원군도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공성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 싸우는 것을 택했으나, 계략은 대실패했고 그는 휘하 150여 명의 군사들을 모두 잃고 1534년에 가까스로 도시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1535년에는 유카탄반도 전체에서 스페인 군대가 쫓겨났다.

몬테조는 1535년에 반도에서 쫓겨난 직후 끊임없이 기회를 노렸고, 마야 부족들을 분열시키는 데에 성공하여 원주민-스페인 연합군을 만들어 결국 유카탄반도를 재점령하는 데에 성공한다. 스페인 국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치첸이트사 지역을 그에게 주었고, 이 곳은 이후 소 목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현대  치첸이트사의 차크물

1843년, 치첸이트사는 그 거대한 규모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서구인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유카탄 여행의 사건들(Incidents of Travel in Yucatan)'을 집필하였는데, 이 집필 과정에서 그는 유카탄반도와 그에 있는 먀야 문명의 옛 도시들을 방문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치첸이트사도 방문했으며, 이에 대한 감상과 견문을 적어 출판하였다. 이 책은 그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유럽인들의 마야 문명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1860년, 데지레 차나이가 치첸이트사를 발굴 조사하였고, 수없이 많은 사진들을 현상하여 이를 모아 1863년에 출판하였다.

1875년, 아우구스투스 레 플롱에온이 치첸이트사를 방문하였고, 이 때 다리가 굽혀져 있고, 등쪽으로 누워 있으며 배 위에 접시를 얹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제단 조각상을 발견한다. 그는 이 조각상을 '차크물(Chacmool)'이라고 이름붙였고, 이후 이는 메소아메리카 지방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조각상들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졌다. 테오버트 말러는 1880년대에 몇 주를 치첸이트사에서 보냈으며, 이때 조사작업과 함께 방대한 규모의 사진을 찍어 보관하였다. 1894년에는 유카탄반도에 파견된 미국의 외교관이자 학자 에드워드 허버트 톰슨은 치첸이트사의 유적이 포함된 아시엔다를 사들였다. 이후 고대 마야 문명에 흥미를 갖게 된 톰슨은 30여 년동안 마야 문명사 연구에 몸을 바쳤고, 이 때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치첸이트사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들과 로사리오(대신관의 신전)에서 몇몇 무덤들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톰슨은 이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샘(Cenote Sagrado)'를 1904년에 준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 때 샘 밑바닥에서 황금, 은, 옥으로 된 유물들을 다수 찾아냈으며, 이 때의 작업으로 인하여 고대 마야인들의 의복과 목제 가구들이 어떤 모양이었는지에 대하여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톰슨은 이 유물들을 배에 실어 하버드 대학교의 피바디 박물관으로 보냈다.

1913년, 카네기 재단의 협조 아래 고고학자 실바누스 G. 몰리는 치첸이트사에서 장기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으나, 멕시코 혁명과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1923년 멕시코 정부는 카네기 재단에게 10년 한도로 미국 고고학자들이 치첸이트사를 발굴하고 복구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 때 미국은 전사의 신전과 천문대 등 주요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 때 멕시코 정부는 엘 카스티요(쿠쿨칸의 신전)와 공놀이 경기장을 발굴하였다.

1926년 멕시코 정부는 에드워드 톰슨을 치첸이트사의 유물들을 국외로 반출한 혐의로 기소하였고, 그의 아시엔다 등 사유 재산을 압류하였다. 당시 미국에 돌아가 있었던 톰슨은 이로 인해 다시는 유카탄반도로 돌아오지 못했고, 미국에서 마야 문명에 대한 그의 연구를 수집, 정리하여 1932년에 출판하였다. 참고로 에드워드 톰슨은 1935년에 뉴저지 주에서 사망하였다. 1944년 멕시코 최고 법원은 톰슨에게 무죄를 판결하였고, 치첸이트사의 톰슨 소유 토지를 톰슨의 자손들에게 돌려줄 것을 판결하였다. 다만 톰슨의 유족들은 그 땅을 관광 사업가 페르난도 페온에게 팔아넘겼다.

이후 성스러운 우물을 재발굴하려는 시도는 1961년과 1967년에 한번씩, 총 2번 있었다. 첫 번째 조사작업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감독 아래 이루어졌고, 두 번째 작업은 개인 투자자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다만 2차례의 작업 모두 멕시코 국립 인류학 역사 학회(INAH)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으며, 이 때 치첸이트사의 타 신전들과 유적들, 예를 들어 오사리오(대신관의 신전)을 동시에 발굴하고 복원 작업을 진행하였다.

 치첸이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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