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xt of 태국

타이 왕국(태국어: 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랏차 아나짝 타이[*]), 약칭 태국(태국어: ประเทศไทย 쁘라텟 타이[*], 문화어: 타이)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 사이에 걸쳐 있는 국가이다. 7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513,120km2,인구는 약 6,600만 명이다. 세계에서 50번째로 면적이 넓은 국가이며, 22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방콕이다. 북쪽으로는 미얀마와 라오스와 접경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접하고 있다. 남쪽에는 타이만과 말레이시아가 있고, 서쪽에는 안다만 해가 있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그리고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타이족은 약 11세기 즈음에 중국 남서부에서 동남아 반도로 이주해왔다. 이후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 왕국, 크메르 제국, 말레이 군주국들이 등장하여 현재 태국계 왕조인 수코타이 왕국, 란나 왕국, 아유타야 왕국과 경쟁을 별였다. 명사에 따르면 14세기말 원나라에 이어 명 태조가 섬라곡국(暹羅斛國)을 섬라국(暹羅國)으로 인정하여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유타야 왕국의 시기인 1511년부터는 포르투갈인들과 만나며 유럽과의 교역을 시작하였고, 아유타야 왕국은 15세기 즈음에 전성기를 맞아 지역 강국으로 번성하였다. 허나 왕국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767년에 버마-태국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탁신 장군이 왕국을 재통합하는 데에 성공했고, 단명한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탁신 장군은 폭정으로 신망을 잃었고, 현재 짜끄리 왕조의 시조인 풋타...더 보기

타이 왕국(태국어: 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랏차 아나짝 타이[*]), 약칭 태국(태국어: ประเทศไทย 쁘라텟 타이[*], 문화어: 타이)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 사이에 걸쳐 있는 국가이다. 7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513,120km2,인구는 약 6,600만 명이다. 세계에서 50번째로 면적이 넓은 국가이며, 22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방콕이다. 북쪽으로는 미얀마와 라오스와 접경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접하고 있다. 남쪽에는 타이만과 말레이시아가 있고, 서쪽에는 안다만 해가 있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그리고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타이족은 약 11세기 즈음에 중국 남서부에서 동남아 반도로 이주해왔다. 이후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 왕국, 크메르 제국, 말레이 군주국들이 등장하여 현재 태국계 왕조인 수코타이 왕국, 란나 왕국, 아유타야 왕국과 경쟁을 별였다. 명사에 따르면 14세기말 원나라에 이어 명 태조가 섬라곡국(暹羅斛國)을 섬라국(暹羅國)으로 인정하여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유타야 왕국의 시기인 1511년부터는 포르투갈인들과 만나며 유럽과의 교역을 시작하였고, 아유타야 왕국은 15세기 즈음에 전성기를 맞아 지역 강국으로 번성하였다. 허나 왕국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767년에 버마-태국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탁신 장군이 왕국을 재통합하는 데에 성공했고, 단명한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탁신 장군은 폭정으로 신망을 잃었고, 현재 짜끄리 왕조의 시조인 풋타엿파쭐라룩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왕조는 현 국왕인 라마 10세까지 왕조를 이어오고 있다.

More about 태국

Basic information
  • Currency 태국 밧
  • Native name ประเทศไทย
  • Calling code +66
  • Internet domain .th
  • Mains voltage 220V/50Hz
  • Democracy index 6.04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66188503
  • 영역 513119
  • Driving side left
기록
  • 선사 시대

    현재 태국 영토에는 대략 2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가장 초기의 쌀 재배 유적은 기원전 2000년 즈음의 것이며, 기원전 1,25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청동기에 진입하였다. 특히 태국 북서부에 있는 반 치앙 유적지는 현재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 생산지로, 당시 태국 지역의 높은 문명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국은 약 기원전 500년 정도에 철기 시대로 진입하였으며, 기원전 2세기 즈음에 태국에 세워진 푸난 왕국은 동남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6세기에는 몬족들이 드바라바티, 하리푼자야 등의 왕국들을 세웠으며, 크메르인들은 9세기 경에 앙코르를 중심으로 크메르 제국을 세웠다.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장악하여 번성한 말레이계 왕조인 탐브랄링가는 약 10세기 즈음에 생겨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은 인도의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푸난 왕국부터 크메르 제국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인도식 문화와 전통이 동남아 전체로 뿌리깊게 스며들어왔다.

    현 태국의 주요 민족인 타이족을 언급한 첫 중국 문헌은 기원전 6세기의 것이다. 타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떤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라오스, 태국, 미얀마, 인도, 중국에서 건너온 다양한 민족들이 5세기에서 8세기 사이동안 섞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타이족은 약 11세기 즈음에 당시 몬족과 크메르인들이 살고 있던 현재의 태국 영토로 이주해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서로 융합되며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수코타이 왕국
     
    수코타이 왕국 시대 만들어진 왓 마하탓의 불상

    크메르 제국과 파간 왕국이 13세기 초에 쇠퇴하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수많은 도시왕국들이 생겨나며 경쟁하였다. 한편 타이족은 끝없이 뻗어나가며 현재의 인도 동북부에서부터 현재의 라오스와 말레이 반도로 이주하였으며, 13세기 즈음에 이르자 이미 드바라티와 라보 왕국 등 대부분의 동남아 영토들까지 세를 뻗치고 있었다. 다만 동남아 현지 문헌에서 타이족들의 이주를 기록해놓은 공식적인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230년대 후반 경, 타이족 계열의 지역 토후였던 씨인트라팃이 크메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1238년에는 스스로 수코타이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현재 태국 역사학계는 수코타이 왕국을 첫 타이족 계열의 왕국으로 치고 있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대왕의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으며 영토를 급격히 늘려나갔다. 다만 이때까지만 하여도 수코타이 왕국은 중앙집권식 국가가 아닌, 여러 제후국들이 모여 만들어진 느슨한 집합체 정도에 불과하였다. 한편 람캄행 대왕은 현재의 타이 문자를 고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재 태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코타이 왕국의 마하 타마라차 1세는 태국에 처음으로 상좌부 불교를 들여오기도 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지역 왕조의 후계자인 망그라이가 1292년에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 왕국을 세웠다. 그는 주변 지역들을 통합하였고, 란나 왕국은 약 200여 년간 주변 일대를 다스리게 된다. 란나 왕국은 메콩 강까지 이르는 정치 동맹을 구축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수많은 인구를 거느리며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한편 짜오프라야 분지 하부에서는 롭부리, 아유타야 등의 도시들이 11세기에 건립되었다.

    아유타야 왕국

    아유타야 왕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으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라보 왕국에서 처음 발흥하였으며, 초대 국왕인 우통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시켜나갔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 아유타야의 국왕과 느슨한 조공 관계로 엮인 형태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아니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군대와 정략결혼을 반복하며 세를 불려 나갔고, 15세기에 이르자 크메르 제국을 공격하고 수도인 앙코르를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아유타야는 크메르를 몰아내고 지역 강국으로 떠올랐으며, 기존의 수코타이 왕국마저 멸망시키고 아유타야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보로마트라일록카낫 국왕은 왕국에 처음으로 봉건제를 도입하였고, 이 봉건제는 20세기까지 이어지며 ‘사끄띠나’라고 불리는 태국 특유의 계급제도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말라카 술탄국을 꺾는데에는 실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아유타야 왕국은 16세기 초에 처음으로 유럽과 교류를 가졌다. 포르투갈의 사절이 1511년에 왕국에 도착하였고, 당시 왕이었던 라마 티보디 2세에게 군사를 공물로 바쳤다. 이후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이 연이어 도착하였다. 그러던 중 몬족이 아유타야 왕국으로 하여금 버마의 따웅우 왕조와 전쟁을 벌이도록 하였고, 1540년대부터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1570년에 아유타야 왕국의 수도가 함락되면서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중흥군주 나레쑤언 국왕이 1584년에 다시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버마의 봉신국으로 남았다.

    아유타야 왕국의 국왕들은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유럽 열강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특히 나라이 국왕의 재위기에 동남아를 여행한 유럽 여행가들은 아유타야 왕국을 중국과 인도와 함께 아시아의 최강국들 중 하나로 묘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다만 지나친 서양과의 친화정책은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낳았고, 결국 1688년에는 나라이 국왕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기도 했다. 다만 이후에도 서양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원만하였고, 프랑스 선교사들도 활동을 계속하며 선교하였다.

    아유타야는 나레쑤언 국왕이 버마에서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이전의 피해를 회복하고 황금기에 들어섰다. 아유타야 왕국은 18세기의 두 번째 사반세기동안 예술, 문학 등을 눈부시게 꽃피웠으며 교육을 중점으로 두어 다양한 문화 발전 정책을 펼쳤다. 또한 1715년에 캄보디아 지역의 통치권을 두고 베트남과 일부 전쟁을 벌인 것만 제외하면, 외교적으로도 매우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런 황금기도 결국 끝을 맞았고, 피비린내나는 계승 전쟁이 일어나며 내분이 발생했으며 장관들과 왕자들이 서로 죽고죽이는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왕국이 약해지는 도중, 1765년에 4만 명에 달하는 버마 군대가 아유타야를 침략하였으며 14달에 걸친 공성전 끝에 마침내 1767년 4월에 수도 아유타야가 함락되며 아유타야 왕국도 멸망하였다.

    톤부리 왕국

    버마가 쳐들어와 수도 아유타야를 함락시키고 왕국이 멸망한 직후, 태국은 정치적 대혼란에 휩싸였다. 버마 군대는 아유타야에 주둔을 계속하였으며, 그와중에 5명의 지방관들이 서로 국왕을 자처하고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들 중 유능한 군사령관이었던 딱신 장군이 점차 내분 상태의 태국을 통합하여나가기 시작하였고, 짜오프라야 강으로 함대를 보내 톤부리를 장악한 이후 같은 해에는 아유타야를 점거하고 있던 버마 군대도 수도가 점령된지 약 7개월 만에 모두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딱신 장군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였고, 톤부리를 임시 수도로 삼아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전쟁을 벌여 버마 세력을 란나 지역에서 1775년에 쫓아내었고, 1778년에는 비엔티안을 함락하였으며 1770년대에는 캄보디아에 태국에 종속된 왕조를 세우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톤부리 왕조 말기에 딱신 장군의 ‘광기’에 반란을 일으킨 쿠데타 세력이 딱신 왕을 몰아냈고,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짜오프라야 차크리 장군이 딱신 왕과 아들들을 죽였다. 차크리 장군은 이후 1782년 4월 6일에 라타나코신 왕국을 건국하며 현재까지 이어져내려오고 있는 짜끄리 왕조를 세우게 된다.

    짜끄리 왕조

    라마 1세가 즉위한 이후, 라타나코신 왕국은 성공적으로 버마의 침략을 이겨냈으며 버마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라마 1세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기도 하였다. 1821년에는 영국의 존 크로퍼드가 시암(태국의 이전 국명)을 방문하여 새로운 무역 조약을 맺으려 하였고, 1826년에는 시암은 영국과 버니 조약을 맺었다. 한편 라오스의 아누웡 국왕은 영국이 이 과정에서 시암을 침공할 것이라고 오해하였고, 1826년에 반란을 일으켜 시암을 공격하려 들었다. 그러나 영국은 시암을 침략하지 않았고, 오히려 라오스는 처참하게 진압당했으며 대다수의 라오스 왕족들이 강제로 방콕으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했다. 시암은 베트남과도 여러 차례 전쟁을 치루었고, 이 전쟁에서 베트남에 우위를 거두며 캄보디아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였다.

    19세기 후반, 시암은 여러 식민지들을 세워 민족적 구성이 다른 영토들까지 한꺼번에 통치하려 들었다. 몽꿋 국왕은 다가오는 서양의 제국주의 위협에 대해 인지하였고, 이후에는 영국 정부에 사절을 보내 긴장을 완화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후 시암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영국은 홍콩 총독이었던 존 보링 경을 보내 보링 조약을 시암과 맺었으며, 이후에도 여러차례 시암과 강제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기 시작하였다. 한편 몽꿋 국왕은 말라리아로 일찍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아직 어린 라마 5세가 왕위에 올랐다.

    라마 5세는 왕실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예제, 농노제를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고, 중앙집중적인 정책들을 많이 내놓았다. 1870년대와 80년대에는 북부에 있던 보호령도 모두 왕국으로 편입시켰으며, 영토를 동북쪽과 남쪽으로 뻗어나가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현재의 각기 부처와 비슷한 12개의 '크롬‘들을 설치하였으며, 여러 차례 근대화 개혁들을 실시하며 국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태국을 사이에 두어 완충 국가로 만들기로 합의하면서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세력들에 의하여 식민화가 되지 않은 국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태국은 영국에게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말레이 반도의 크다(Kedah)·프를리스(Perlis)·트렝가누(Terengganu)·클란탄(Kelantan)[1]을, 프랑스에게는 메콩강 왼쪽 연안의 라오스를 떼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빠따니라 불리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나머지 지역[2]은 오늘날에도 태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치외법권 같은 불공정한 조약들도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였다.

    한편 시암은 연합국 측이 이전의 불평등조약들을 개정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에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시암은 승전국이 되었으며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관세의 자유, 그리고 치외법권의 폐지 등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입헌군주정

    1932년에는 피분송크람 장군과 태국인민당의 주도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 쿠데타로 인하여 국왕은 실권을 잃고 명예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라마 7세는 강제로 헌법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이로 인해 시암은 전제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체제가 바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대공황의 바람이 시암에도 몰아닥쳤고, 쌀 가격이 폭락하고 경제가 급하강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후 1933년에 쿠데타 세력들을 몰아내고 전제군주정을 되돌리려는 또다른 쿠데타가 터졌으나, 실패하였다. 라마 7세는 지속적으로 정부와 갈등을 겪으며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반강제로 퇴위하였다. 라마 7세가 퇴위한 직후, 정부는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난다를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라마 8세이다.

    이후 태국 인민당의 군부 출신 인사들이 점차 시암의 정치계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하였다. 피분송크람 장군은 1938년에 총리직에 올랐고, 정치적인 탄압과 동시에 반왕실 정책들을 펴나가며 독재 체제를 굳혔다. 송크람 정부는 반중, 반프랑스, 서구화 정책을 펼쳤고, 1940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태국’으로 바꾸었다. 1941년에는 비시 프랑스 정부와 무력 충돌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 일부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하였다.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 제국의 침공을 받았고, 일본과 싸울 여력이 없었던 송크람 정부는 개전 직후 휴전을 선언했다. 일본군은 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하였고, 12월 21일에는 군사 협정을 맺어 일본이 태국이 서구 세력들에게 잃어버린 영토 수복을 도와주는 대신에 세계 대전에서 일본 편, 즉 추축국 편에서 싸우기로 합의하였다. 태국은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송크람의 독재와 일본의 간섭에 맞서 국민들이 자유타이운동(Free Thai Movement)를 벌였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일본이 완벽히 패망하며 세계 대전이 끝났다. 다만 승전국 측이었던 연합국들이 태국의 선전포고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간신히 패전국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1946년 6월에 젊은 라마 8세가 수상쩍은 총기 사고로 인하여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인 라마 9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태국은 1954년에 공산주의에 맞서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1957년에는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동안 태국 정계를 지배해오던 태국 인민당을 쫒아낸 이후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신적인 왕실의 권위에 힘입어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들을 서서히 제거해나가면서 권력을 굳혔다. 타나랏 장군은 태국의 인프라와 교육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으며, 1961년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직후에는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어 미국의 태국 보호를 확인받기도 하였다.

    이시기 태국 사회는 급격한 서양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수많은 농촌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방콕 등 대도시로 모여들었으며, 도시민들에 비하여 자신들이 소외받았다고 느낀 농촌의 농부들은 점차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한편 이시기에는 경제 발전이 급격히 이루어지며 방콕 등의 대도시에서 막대한 양의 중산층이 생겨나기도 했다. 1971년 10월에는 타놈 끼띠카쫀 총리의 독재에 맞서 대중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국왕이 직접 개입하여 끼띠카쫀 총리를 몰아내고 법학자 출신의 사냐 다르마삭티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하며 1932년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사례를 남겼다. 이후 태국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의회 민주주의를 맛보았는데, 이 얼마 되지 않은 민주화 시기를 태국 현지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핀 시기(ยุค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เบ่งบาน)’라고 칭한다.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현대

    사이공이 함락되며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안그래도 불안정했던 태국 사회는 갈수록 흔들렸으며 극우 세력들은 좌파 계열의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1976년에는 탐마삿 대학의 학생들이 대거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그날 쿠데타가 일어났고, 태국의 민주정부가 쫒겨난 자리에는 극우세력이 득세한 정부가 들어서 언론인, 관리,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극우 정부는 반공을 내세우며 독재를 정당화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탄압하며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같은 해 일어난 또다른 쿠데타로 인하여 그나마 더 온건한 성향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1978년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우호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난민 문제, 국경 분쟁, 경제 문제들이 연이어 겹치며 악재에 시달리자, 쁘렘 띤나술라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총리로 재임하였다. 쁘렘 총리 시기는 종종 ‘반-민주주의’ 시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양원제로 구성된 태국의 의회들 중 하원은 모두 민주 선출제로, 상원은 모두 임명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기에는 국왕이 점차 정사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에는 처음으로 태국에서 선거를 통하여 뽑힌 총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1991년의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수찐다 끄라쁘라윤 장군은 자신이 총리직에 관심이 없음을 밝혔으나, 1992년 대선에서 비리를 저지르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이때도 라마 9세가 또다시 정국에 개입하며 국민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수찐다 총리는 그날로 사직하였다. 1997년에 터진 아시아 금융위기는 40여 년에 이른 경제성장을 끝내버렸다. 정부는 IMF에게 구제 금융을 받았으며, 이는 수많은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포퓰리스트 정치인 탁신 시나와트라가 이끄는 정당이 이에 편승하여 인기몰이를 하였고, 탁신 총리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하였다. 한편 2004년 인도양에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며 태국 남부를 대대적으로 덮쳤고,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일어나며 탁신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게 증폭되었다. 이후 탁신 총리의 2기 집권기에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2006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며 탁신 총리도 쫒겨났다. 군부 세력은 군정을 설치하였고, 이 군정은 대략 1년 정도 지속되었다.

    2007년에는 탁신 전 총리와 연합한 태국 인민의 힘 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인민의 힘 당은 민주당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고, 이후 탁신계 인사들이 정부에 줄줄이 재등용되는 것에 반대한 세력들이 시위를 일으켰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2011년 총선에서도 탁신계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탁신의 누이인 잉락 시나와트라가 새로운 총리로 당선되었다. 반대세력들은 탁신의 친척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시위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잉락 총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미루려 들었으나, 헌법재판소가 이를 저지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2014년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고, 쁘라윳 찬오차 장군의 주도하의 국가평화유지위원회가 결성되어 현재까지 태국을 통치해오고 있다. 쁘라윳 총리는 시민권과 정치권을 제한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모독하는 행위들을 엄격히 단속하는 탄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야당과 반대 세력들은 ‘단속 캠프’로 보내지고 있다는 설도 있어 논란은 여전히 증폭되고 있다. 한편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라마 9세가 2016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라마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2019년에는 군부가 3월에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하였고, 쁘라윳 총리는 군부를 지지하는 팔랑쁘라차랏당의 지원을 받아 총리직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2020년 들어서는 코로나 19 사태와 함께 내려진 비상 봉쇄령에 반발하며 2020년 태국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곳은 나중에 말레이시아 북부의 주가 된다. 이는 다시 4개의 구역으로 세분된다.
    Read less

Phrasebook

안녕하십니까
สวัสดี
세계
โลก
안녕하세요 세계
สวัสดีชาวโลก
고맙습니다
ขอขอบคุณ
안녕
ลาก่อน
ใช่
아니
ไม่
잘 지내고 있나요?
คุณเป็นอย่างไรบ้าง
좋아, 고마워
สบายดีขอบคุณ
얼마예요?
ราคาเท่าไหร่?
ศูนย์
하나
หนึ่ง

Where can you sleep near 태국 ?

Booking.com
489.024 visits in total, 9.195 Points of interest, 404 목적지, 70 visit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