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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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 of 파키스탄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우르두어: اسلامی جمہوریہ پاکِستان 이슬라미 줌후리예 파키스탄, 영어: Islamic Republic of Pakistan 이슬라믹 리퍼블릭 오브 파키스탄[*]), 약칭 파키스탄(우르두어: پاکستان, 영어: Pakistan 파키스탄[*])은 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약 225,199,168 명(2021년)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무슬림의 수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2024넌 군사력 순위는 4~5위로 여겨진다. 면적은 약 796,095km²로 세계에서 33번째로 거대한 크기이다. 아라비아 해와 오만 만을 따라 1,046km의 해안선을 남쪽에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쪽으로는 이슬라믹이마랏으로 이름을 바꾼 아프간, 서쪽으로는 옛 페르시아제국의 중심이였던 이란, 북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오만과는 해상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다. 사람들에 따라 선진국의 기준이 다르지만 행복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을 선진국으로 보고 있다. 파키스탄은 전에 1~2위의 초강대국이었던 무굴제국의 중심지이고 비르야니와 카레라는 유명한 향신료들로 만든 맛좋은 별미들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모사나 카레는 원래 무굴 제국 이슬람 왕정 때 생긴 음식이다. 중국의 만두도 원래 파키스탄의 사모사라는 음식이다.

파키스탄은 여러 고대 문명들의 발원지로, 8,500년이 넘은 남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더 보기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우르두어: اسلامی جمہوریہ پاکِستان 이슬라미 줌후리예 파키스탄, 영어: Islamic Republic of Pakistan 이슬라믹 리퍼블릭 오브 파키스탄[*]), 약칭 파키스탄(우르두어: پاکستان, 영어: Pakistan 파키스탄[*])은 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약 225,199,168 명(2021년)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무슬림의 수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2024넌 군사력 순위는 4~5위로 여겨진다. 면적은 약 796,095km²로 세계에서 33번째로 거대한 크기이다. 아라비아 해와 오만 만을 따라 1,046km의 해안선을 남쪽에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쪽으로는 이슬라믹이마랏으로 이름을 바꾼 아프간, 서쪽으로는 옛 페르시아제국의 중심이였던 이란, 북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오만과는 해상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다. 사람들에 따라 선진국의 기준이 다르지만 행복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을 선진국으로 보고 있다. 파키스탄은 전에 1~2위의 초강대국이었던 무굴제국의 중심지이고 비르야니와 카레라는 유명한 향신료들로 만든 맛좋은 별미들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모사나 카레는 원래 무굴 제국 이슬람 왕정 때 생긴 음식이다. 중국의 만두도 원래 파키스탄의 사모사라는 음식이다.

파키스탄은 여러 고대 문명들의 발원지로, 8,500년이 넘은 남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청동기 인더스 문명의 태동지이기도 하다.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이 등장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잠시 헬라 왕국을 통하여 파키스탄 지방을 정복한 이후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마우리아 제국, 쿠샨 제국, 굽타 제국 등이 연달아 나고 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또한 우마이야 칼리파조, 가즈나 제국, 델리 술탄국, 무굴 제국, 두라니 제국, 시크 왕국 등이 파키스탄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근대기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고 1858년부터 1947년까지는 인도 제국으로 묶여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점차 인도 제국의 국민들이 자결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파키스탄 지방에서도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운동’이 일어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1947년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힌두교가 주축이던 인도와, 이슬람교가 주축이던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독립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하거나 살해당하는 대규모 디아스포라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파키스탄은 민족적, 언어적으로도 굉장히 다원화된 국가이며, 지리와 야생환경도 다양한 편이다. 파키스탄은 1956년 헌법을 제정하여 이슬람 공화국임을 명시하였으며,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 방글라데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이후 약 40여 년 동안 파키스탄은 문민 정부와 군부 정권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집권하며 복잡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속세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가 공존하는 굉장히 미묘한 사회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2008년에 완전한 문민정부를 선거를 통해 구성하였으며, 2010년에는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포함한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현재 6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갖추고 있으며, 핵보유국이며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속하며, 그 경제성장률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파키스탄은 UN, 상하이 협력 기구, OIC, 커먼웰스, SAARC, 비동맹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다.

More about 파키스탄

Basic information
  • Currency 파키스탄 루피
  • Calling code +92
  • Internet domain .pk
  • Mains voltage 230V/50Hz
  • Democracy index 4.31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223773700
  • 영역 881913
  • Driving side left
기록
  •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 신왕의 조각상고대 - 중세

    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인더스 문명이 바로 현재...더 보기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 신왕의 조각상고대 - 중세

    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인더스 문명이 바로 현재 파키스탄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파키스탄 지역에서는 구석기 후기 시절부터 소아니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펀자브 지방에서는 이들이 사용한 석기 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현재 파키스탄에 대부분의 지역을 걸치고 있는 인더스 유역은 신석기와 청동기 이래 기원전 2800년부터 기원전 1800년까지 여러 문명들이 발원한 고대 문명의 요람이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도시들로는 하라파나 모헨조다로 등이 번영을 누렸다.[1][2]

    인더스 문명 이후인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500년까지는 인도-아리아 문명이 번성하였으며, 이 시기를 베다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를 ‘베다 시대’라고 일컫는 이유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교 최고의 경전인 베다가 이 시기에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다 문명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세워진 펀자브 지방의 탁실라에서 그 번영의 정점을 찍었으며, 기원전 519년 경에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이 등장하였고 기원전 326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린 헬레니즘 제국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들어섰다.[3] 이후에는 찬드라굽타 대왕이 마우리아 제국을 세웠고, 이후 아소카 대제가 등장하면서 마우리아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히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세운 인도-그리스 왕국은 간다라 지방과 펀자브 지방을 다스렸으며, 메난드로스 국왕 시절에 최대 영토를 자랑하면서 그리스-불교 문명을 널리 퍼뜨렸다. 이때 가장 번영한 지방이었던 탁실라는 세계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대학을 지었으며, 교육 수준도 가장 높은 수준이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미 대학을 가지고 있었다.[4] 당시의 학교들은 여러 강의실들과 기숙사들을 가지고 있는 사원과 비슷한 구조였으며, 주로 가르치는 내용들은 종교적, 신학적 내용이었다. 이 파키스탄의 고대 학교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침공할 당시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기록으로 남겼으며, 4세기와 5세기 경의 중국에서 건너온 순례자들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5]

    한편 489년에서 632년까지 번성한 신드 주의 라이 왕조는 그 국력의 전성기 시절에 파키스탄 지역을 다스렸다. 또한 마지막 불교 제국이었던 팔라 왕조는 다르마팔라 왕과 데바팔라 왕 시절에 남아시아 쪽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북인도를 거쳐 현재의 방글라데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이슬람 제국

    711년 경에는 아랍에서 건너온 무슬림 정복자인 무하마드 빈 카심이 신드 지방을 정복하였다.[6] 이슬람을 신봉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이때부터 파키스탄의 기초가 제대로 놓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만, ‘파키스탄’이라는 단일 국가의 개념 자체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에 파키스탄 정부의 공식 주장에는 약간 하자가 있다.[7] 어쨌든 중세 초기인 642년 경부터 1219년 경까지 파키스탄 지방에는 점차 이슬람교가 뿌리깊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수니파 선교사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지역의 불교도들과 힌두교도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8] 이후 파키스탄 지방에서 등장한 제국과 왕국들은 모두 이슬람교를 믿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국가들이 기원전 975년부터 1187년까지 존속한 가즈나 제국, 샨사브 왕국, 1206년부터 1526년까지 존속한 델리 술탄조 등이 있다. 또한 델리 술탄조의 마지막 왕조였던 로디 왕조를 몰아내고 인도를 정복한 무굴 제국 또한 무슬림 제국이었다.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

    1526년에 건국된 무굴 제국은 이후 인도를 대부분 정복하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널리 퍼뜨려나갔고,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지방에도 인도-페르시아 문화가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무굴 제국 시대에 파키스탄 지역의 대도시에는 라호르와 타타 등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 도시들에는 웅장한 무굴 제국 시절의 건물들이 매우 많은 편이다. 파키스탄 지역은 16세기 초부터 계속 무슬림 황제들이 다스리는 무굴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으나, 18세기 초부터는 점차 서구 열강들이 인도로 침입해들어오며 무굴 제국이 망해가기 시작하자 점차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9]

    전세계적으로 식민주의의 광풍이 불던 18세기 경, 영국 동인도회사는 파키스탄의 해안선 지역에 여러 무역기지들을 설치하였으며, 영국은 상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켜낸다는 구실로 이 기지들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점차 파키스탄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10] 결국 동인도회사는 1765년에는 다른 서구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인도 아대륙 전부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나중에는 벵골 지역도 점령하고 군대를 통한 통제력을 대폭 강화하면서 1820년 경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 이르는 광대한 유역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를 파키스탄의 식민기의 시작으로 본다.[11] 이 시기의 파키스탄은 영국의 사실상 지배를 받았으며, 동인도회사는 단순히 경제적, 정치적 동화뿐만 아니라 교육, 사회, 문화적으로도 현지인 탄압과 동시에 대대적인 동화 작업을 벌이면서 파키스탄 사회에 격랑을 불어넣었다.[12] 가장 대표적으로 1835년의 영국교육법, 인도시민법 등이 있다. 한편 영국이 자체적인 서구식 학교들을 세우며 서구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자, 본래 인도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서당과 비슷한 교육기관이었던 ‘마드라사’는 영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때 많은 수의 마드라사들이 강제로 문을 닫았다.

    식민기

    18세기 들어 무굴 제국이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망조가 들어가자,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시크 제국이 일시적으로 그 틈을 타서 상당히 거대한 영토를 정복, 다스리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전역의 확고한 지배권을 노리던 영국 동인도회사가 쳐들어오자 멸망하고 말았다. 1857년에는 벵골 지방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대영제국을 상대로 한 무력 봉기였던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13] 한편 영국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현지인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인도의 가장 대표적인 두 이질집단이었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에게 이 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영국은 이 두 집단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대거 불러일으켰고, 언어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판이했던 인도는 갈수록 분열을 거듭하고야 만다.[14] 한편 힌두교도 지식인들은 힌두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내용의 ‘힌두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하여 영국령 인도에서 더 큰 사회적 권력을 얻고자 하였다. 한편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고 수적 열세를 이겨내기 위하여 아예 2개의 국가로 나누어 갈라서자는 주장까지 펼쳤고 1906년에는 전인도 무슬림연맹을 창설하여 무슬림 세력을 결집하였다. 당시 힌두교도들의 주축 세력이었던 인도국민회의가 반영 투쟁을 벌이며 인도 독립을 외쳤던 것과는 달리, 무슬림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친영적인 목소리를 띠었으며 영국적 민주주의, 의회제도 등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15]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힌두교도들을 믿는 인도인들을 중심으로 수백만명이 결집한 대대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이 일어나 영국에 대항하기도 했다.

    한편 무슬림 세력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슬람교를 대표할 세력이 인도 정계에 두드러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12월 29일에는 당시 전인도 무슬림연맹의 위원장이었던 알라마 이크발이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 제국의 북서부 지역, 즉 펀자브, 북서부 국경지대, 신드 주, 발루치스탄 등을 따로 독립시키겠다’라고 선포하였다. 한편 인도 정계가 힌두교도들에 의하여 장악당하고, 무슬림 세력의 목소리가 갈수록 묻혀가자, 1937년과 1939년 사이에 당시 무슬림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다시 2국가 독립론을 활발히 띄우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인도 내 무슬림 세력은 영국을 지지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2국가 독립론을 영국에게 적극적으로 표명하였고 점차 힌두교를 믿는 인도 제국의 나머지 지방들과는 멀어져만 갔다.

    파키스탄 운동

    1946년에는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하여 인도와 파키스탄 지방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독립, 자치적인 의회를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거에서 무슬림 연맹은 무슬림들에게 할당된 의석수 가운데 90%를 휩쓸었으며,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외치던 무슬림 연맹의 목소리가 나날로 커져갔다.[16] 무슬림 연맹이 인도 내 무슬림들의 단일 대변자임을 부정하던 인도 국민회의조차도 어쩔 수 없이 무슬림 연맹을 동등한 협상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도 인도의 모든 무슬림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천명한 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그의 2국가 독립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를 2개로 나뉘어 독립시키고 싶지 않던 영국은 ‘내각 작전(Cabinet Misson Plan)'을 통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을 묶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하기도 했다.

    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각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영국은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영국의 식민통치를 완전히 끝내며 더 이상 인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17] 이를 자와할랄 네루 등 인도 국민회의와 무함마드 알리 진나 등 무슬림 연맹이 받아들이면서 1947년 6월까지 마운트배튼 인도 부왕에게서 권력을 이양한다는 내용이 결정되었고, 1947년에 영국이 인도 식민지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독립시킨다는 것을 승인하면서 마침내 1947년 8월 14일에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18] 당시 파키스탄의 영토는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 인도 제국의 동부 지방과 북서부 지방이었는데, 크게 발루치스탄, 동부 벵골, 북서부 국경지방, 서부 펀자브, 신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 있던 펀자브 지방에서는, 분할 독립이 선포되자마자 힌두교도들과 무슬림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대략 2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에 달하는 사람들이 종교갈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이 과정에서 5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여성들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에게 납치되거나 강간당했으며, 3만 3천 명의 힌두교도 여인들 또한 무슬림들에 의하여 같은 일을 당했다.[20] 이후 대대적인 이주가 일어났고, 65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으며 470만 명에 달하는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피난을 갔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이주 사건이기도 했다.[21] 이 과정에서 잠무-카슈미르 지방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 영유권 문제와 해묵은 종교갈등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결국 1947년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현대

    1947년에 독립을 이룬 직후,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파키스탄의 첫 총독으로 부임하였으며, 파키스탄 의회의 대변인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9월 11일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파키스탄 지도부는 무슬림 연맹의 사무총장이었던 리아콰트 알리 칸을 파키스탄의 첫 총리로 임명하기로 경정하였다.

    한편 영국은 인도의 분할 독립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여러 영국 지도자들은 파키스탄의 건국을 좋게 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마지막 인도 부왕이었던 마운트배튼 경이었는데,[22] 그는 무슬림들이 주도한 파키스탄의 건국과 그 전망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마운트배튼 경은 후에 만일 당시 파키스탄의 지도자였던 진나가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틈을 타 파키스탄에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냐고 묻자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23]

    1949년 경 파키스탄의 존경받던 이슬람 법학자인 샤비르 아흐마드 우스마니, 그리고 이슬람 정당인 자마트-에-이슬라미의 학자였던 마우라나 마우두디가 주도하여 이슬람교와 샤리아에 기반한 파키스탄의 헌법을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마우두디는 제헌의회가 헌법에 ‘유일신의 최고권위’를 명시하고, 샤리아가 일반법보다도 더 상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과시켰다. 자마트-에-이슬라미를 필두로 한 이슬람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1949년 3월에는 마침내 이슬람교가 국가의 근본이라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안에는 ‘우주 만물이 최고 유일신에게 속하며, 그 분이 파키스탄에게 위임하신 권한은 오직 그 분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으리라’라는 내용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같은 내용은 1956년, 1962년, 1973년의 개헌된 헌법에도 똑같이 들어갔다.[24]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은 불안한 국내 정세를 근거로 계엄령을 선포하며 막 자라나던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의 아유브 칸 장군이 그를 내쫒고 권좌에 올랐다. 1962년에 대통령제를 채택한 이후, 파키스탄은 1965년에 인도와 2차로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전쟁 직후에 급격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이에 실망한 국민들로 인하여 1967년에는 대규모 시위도 일어났다.[25] 아유브 칸을 이어 파키스탄의 지도자가 된 군부 출신의 야히야 칸 대통령 시절에는 동파키스탄을 덮친 위력적인 사이클론 때문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독립 이래 첫 민주적인 선거가 열렸으며, 군부 독재에서 민주정으로 변화가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지역정당인 아와미 연맹이 당시 여당이던 파키스탄 인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아히야 칸 대통령과 군부는 권력을 승계해 주기를 거부하였고, 서치라이트 작전을 펼치며 대대적인 무력 탄압을 시도하였다.[26] 이로 인하여 동파키스탄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소요가 일어났고, 결국 대대적인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이 내전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라고 칭하는데, 이 전쟁에서 벵골 군대가 파키스탄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국명으로 파키스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대략 30만 명에서 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방글라데시 정부 측에서는 3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이는 일부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27] 한편 파키스탄과 앙숙이던 인도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고자 물자 등을 지원하자 파키스탄이 육해공군을 동원하여 인도를 선제공격하였고, 이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인도에게 패전하면서 결국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떨어져나가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28]

    파키스탄이 인도에게 항복하고 난 직후, 아히야 칸 대통령은 그 책임을 물어 자리에서 쫒겨났고 그 대신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이 취임하여 헌법을 개정하는 등 민주화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부토 대통령의 정당이었던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민주정은 대략 1972년에서 1977년까지 지속되었고, 이 시기에 계몽주의, 좌파 세력의 대두, 국민주의가 두드러지고 전국적으로 재건 운동이 일어나는 등 일부 진일보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다. 1972년에는 외국의 침입을 막는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핵개발에 나섰으며, 그 해에 첫 핵시설이 완공되었다.[29] 최대 주적인 인도가 1974년에 첫 핵시험을 실시하는 것으로 이에 맞서자, 파키스탄도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979년에는 파키스탄도 드디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민주정은 1977년에 파키스탄 인민당의 좌파 정권에 반발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끝난다. 무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1978년에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군부 정권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기업화와 경제화 정책을 펼치며 파키스탄을 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권으로 올려놓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미국이 무자헤딘에게 지원을 해주는 것을 도와 소련 지배하의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몰아내는 데에 일조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지대였던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은 반공산세력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세력들은 아프간 공산정부가 이슬람을 탄압하는 것을 비난하며 파키스탄 정부에게 ‘지하드’에 나서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지아 대통령은 1988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고, 그 뒤를 부토 전 대통령의 딸이었던 베나지르 부토가 승계하면서 군부의 지배를 끝내고 다시 민간 정부를 복원하면서 파키스탄의 첫 여성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키스탄 인민당은 보수적인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이후 수십년 동안 두 정당이 권력을 다투는 와중에 파키스탄의 경제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다. 경제 지표는 날로 추락했고,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부정부패가 판을 쳤고 인도와의 갈등은 터지기 직전이었으며 좌우 이념 갈등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30] 1997년의 총선에서는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이 압도적 의석을 쓸어가며 대승을 거두었고, 인도가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의 주도 하에 2차 핵실험을 하자 파키스탄도 이에 맞서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인도와의 갈등이 날로 심각해져가던 와중에, 카길 지역에서 군사적 대치 상태가 고조되었으며 1999년에는 카길 전쟁이 터졌고, 국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군부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31] 무샤라프 대통령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최고행정위원장으로, 2001년부터 2008년까지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독재 정치를 폈고, 이 시기에 대대적인 계몽 정책을 펼쳤으며 사회자유주의, 경제 자유화 정책을 펴나갔다.

    2007년에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암살된 이후, 파키스탄 인민당이 부토 전 총리의 암살을 계기로 동정표를 굉장히 많이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2008년에 다수 의석을 확보하였고, 유사프 라자 길라니가 새 총리로 취임하였다. 의회에서 밀린 무샤라프 대통령은 탄핵의 위협을 느끼고 결국 2008년 8월 18일에 사임하였고, 그 뒤를 부토 전 총리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이 이으며 파키스탄 인민당이 다시금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자르다리 대통령의 지나친 부패 행각, 그리고 사법권 침해 등 행정권 남용으로 인하여 의회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정계가 혼란스러워졌고, 2013년에는 자르다리 대통령이 결국 차기 대선 및 총선 불출마를 발표하였다.

    2013년에는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았고, 이로 인하여 건국 66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017년 8월에는 새 총리로 무슬림 연맹 소속인 샤히드 하칸 압바시 총리가 선출되었다.

    한편 2018년 7월 25일에 진행된 총선에서, 현 파키스탄 총리인 임란 칸이 이끄는 파키스탄 정의운동이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면서 새로운 여당이 되었다.[32]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인민당,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군부가 돌아가면서 정권을 차지하던 순환고리를 깨고 마침내 임란 칸이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였다.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에서 열린 금요일 대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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