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alia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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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 of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 레푸블리카 이탈리아나[*]), 약칭 이탈리아(이탈리아어: Italia, 약자: IT, 문화어: 이딸리아, 음역어: 이태리)은 본토와 지중해의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북쪽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반도이다.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해, 남쪽의 이오니아해, 서쪽의 티레니아해와 리구리아해가 있다. 이탈리아의 영토 안쪽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접하여 있으며, 스위스 영토 안쪽에 이탈리아의 월경지 영토인 캄피오네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40 km2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같은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더 보기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 레푸블리카 이탈리아나[*]), 약칭 이탈리아(이탈리아어: Italia, 약자: IT, 문화어: 이딸리아, 음역어: 이태리)은 본토와 지중해의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북쪽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반도이다.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해, 남쪽의 이오니아해, 서쪽의 티레니아해와 리구리아해가 있다. 이탈리아의 영토 안쪽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접하여 있으며, 스위스 영토 안쪽에 이탈리아의 월경지 영토인 캄피오네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40 km2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같은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이탈리아 왕국)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EC)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서 삶의 질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이 나라는 높은 생활 수준을 구가하며, 2010년 인간 개발 지수는 24위였다. G7과 G20 소속이며, 2011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8위이다. 이탈리아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된 나라이기도 하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원년 회원국이다. 그 밖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와 세계 무역 기구(WTO),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의 일원이다. 이탈리아의 군비 지출은 세계 8위이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 공유에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특히 로마)는 정치와 문화 면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데, 식량 농업 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 식량 계획(WFP)의 본부가 이 곳에 위치한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더불어 유럽의 정치, 사회,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요 지역 강국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 세계화된 나라이며, 2009년 국가 브랜드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기대 수명은 뉴질랜드와 버뮤다 다음 세계 19위로 길다. 또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는 해외에서 4,37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나라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분에서 보여지듯(44곳)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대학 졸업자의 첫 연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000유로이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으로는 피자, 젤라또, 파스타 등이다.

More about 이탈리아

Basic information
  • Currency 유로
  • Native name Italia
  • Calling code +39
  • Internet domain .it
  • Mains voltage 230V/50Hz
  • Democracy index 7.74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58850717
  • 영역 302068
  • Driving side right
기록
  • 고대 시기
    고대 시기

    대략 85만 년 전부터 원생 인류들이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략 20만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들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전하며, 현생 인류는 약 4만 년 전부터 살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선사 시대에도 중요한 인간 활동의 무대여서 라치오주, 토스카나, 움브리아, 바실리카타 지역 등 곳곳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로마 시대 이전의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인들이 속한 라틴족, 사비니족, 켈트족, 삼니움 족 등이 모여 살았으며, 대다수가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기원전 17세기와 11세기에 미케네 문명의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처음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해안을 따라 시칠리아 지방과 반도 남부에 여러 도시국가들을 세워 식민지화하였다. 이 때의 그리스와의 접촉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민주정의 개념과 뛰어난 예술, 문학 양식들을 전파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 제국

    로마는 기원전 753년, 테베레강 인근에 세워진 도시국가로, 이후 244년간 라틴과 사비니 계통의 왕정을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였다. 이후 7명의 왕들이 즉위하여 로마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509년에는 로마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후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가 확장함에 따라 에트루리아, 켈트, 그리스인들을 정복하며 로마의 통치하에 편입되었다. 정복된 이탈리아의 부족들 대부분은 로마로 매우 성공적으로 융화되었으며, 나중에는 로마가 아예 서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를 대대적으로 정복할 때에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뛰어난 장군이 등장하였으며, 그는 로마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사실상 로마의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어놓았다. 시간이 흐르자 로마 제국은 브리튼섬에서 페르시아까지 이르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지중해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내부에 넣으며 막대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나긴 황금기의 서막을 열었으며, 이후 현명한 명군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불리는 200여 년에 달하는 번영기를 맞으며 크게 번성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위치한 곳으로 제국의 최고 중심지라는 영예를 안았으며, 심지어는 '렉트리스 문디', 즉 세계의 여왕이라 불리며 화려하게 문명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선두에 서있는 나라들 중 하나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들 중 하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 하의 로마 제국은 5백만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거느렸으며, 제국의 문명은 이후의 서구 문명들에게까지 깊숙한 영향을 미쳐 가히 서양의 토대를 놓았다 할 정도로 서구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달력, 수 체계, 언어, 문자 등이 모두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전래되었으며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가 서양의 중심 종교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시기 로마는 저 멀리 있는 인도와도 무역을 전개하였으며, 폼페이에서 상아로 만든 여신 락슈미의 조각상이 발견될 정도였다.

    이토록 번영한 로마 제국마저 쇠퇴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기에, 기원후 300년 경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하였으며, 이들 중 이탈리아 반도가 속해있었던 서로마 제국은 지속되는 야만족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쫓아내며 멸망하고 말았다. 다만 동로마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가 이후 1,000여 년을 더 지속할 수 있었다.

    중세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오도아케르가 세운 왕국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동고트족의 손에 떨어졌다. 6세기 경에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데에 성공하며 다시 로마 제국의 세력권에 다시 들어갔으나, 게르만 부족인 랑고바르드족이 대거 밀려오면서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와 같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시 이탈리아를 뺏기고 물러나야만 하였다. 이 때 이후로 이탈리아 반도는 약 1,300여 년 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국가로 쪼개져 분열하게 된다. 야만인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 약탈을 저질렀기에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른다. 랑고바르드인들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은 8세기 후반 경 카롤루스 대제가 세운 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는데, 이 때 프랑크 왕국은 종교적인 정통성을 획득하고 교황과의 친밀도를 올리기 위하여 로마를 포함한 그 주변지역을 교황령(Papal State)로 떼어 주었다. 이후 교황 레오 3세는 이에 화답하여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바쳤으며, 이때부터 신성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때부터 13세기까지는 이탈리아의 정치는 대부분 신성로마 제국과 교황 사이의 협력과 갈등 관계를 다루는데, 이 두 권력이 다툴 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편을 든 쪽을 기벨린, 교황의 편을 든 쪽을 구엘프라고 부른다.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은 함께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양쪽은 누가 더 세속적인 권위에서 우월한 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다투었고 왕, 추기경, 귀족들을 임명하는 문제에서 서로를 무시하고 갈등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로 인하여 기벨린과 구엘프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황제와 중앙의 영향력이 약해지며 여러 도시국가들이 독립하여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워낙 황제와 교황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하였기에 치안은 위협받았고 그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었다. 이 때문에 여러 도시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서야 했고, 치안과 경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1176년에는 이 도시들이 모여 만든 롬바르디아 동맹이 레그나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를 이기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 대부분이 황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독립한 도시 국가들 중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은행업과 대부업 등이 새롭게 갈라져나왔으며,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도 크나큰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해안과 남부 지역에서는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해양 공화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방으로의 교역로를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어내었다. 이들은 한때 동로마 제국이 통치했던 지역들에서 새롭게 설립된 공화국들로, 모두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고 독립적인 자율을 누렸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들의 성립은 학문적,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냈고, 이 시기에 가장 잘 알려져 있던 해양 공화국들에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 등이 있었다. 이 국가들은 지중해의 섬들을 서로 따로따로 통치하였으며, 지중해의 해역들을 크기에 따라 나누어 가지며 그 영유권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심지어 중동이나 흑해, 북아프리카까지 식민지들을 개척하였으며, 가장 세력이 강했던 베네치아는 17세기 중반까지 키프로스, 그리스, 달마티아 등의 지역에 막대한 크기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동방으로 향하는 유럽의 주요 길목이었으며, 유리 산업의 중심부였다. 한편 피렌체는 비단, 양모, 은행, 보석업이 성행하였으며 이 산업들로 엄청난 자금을 벌여들였다. 이처럼 막대한 자금들이 이탈리아 내부로 유입되자, 자연히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공화국들은 서로 원정과 전쟁들을 앞다투어 벌였으며, 주로 이 전쟁들을 통하여 교역로들을 차지하고 경쟁국들의 국력을 깎아보고자 노력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시아로 향하는 마르코 폴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주기도 하였다. 대학들이 세워졌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문학을 발전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신성로마제국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피렌체에서는 자본주의와 은행업을 기반으로 한 유력 가문들이 떠올랐다. 피렌체에서는 단테나 조토 디 본도네 등의 대예술가들이 1300년대에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의 시칠리아에서는 9세기 경에 무슬림들이 침입하여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웠다. 이 토후국은 11세기 경에 이탈리아 노르만 족들이 랑고바르드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토와 함께 멸망당했다. 이후 남부 이탈리아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점차 하나의 세력 밑에 결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호엔슈타우펜 왕가, 나중에는 앙주의 카페 왕가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5세기부터는 아라곤 가문이 주도권을 쥐었다. 또한 사르데냐 지방에서 한때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도시들이 독립하여 주디카티를 형성, 따로 번영하였으며,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다만 몇몇 섬들이 제노바나 피사의 영역권으로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디카티들은 15세기에 아라곤 가문이 합병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48년 즈음에 닥친 흑사병은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를 사망시키며 엄청난 공포와 인명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전염병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하였고, 도시들과 경제가 부흥하며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근대

    이탈리아는 13세기와 14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이 르네상스 시기를 중심으로 유럽의 중세기와 근대기를 나누며, 신과 교회에 편중되어 있던 사회에서 벗어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급속도의 발전을 이룩하고 서양이 본격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시대로 본다. 이 때의 이탈리아 반도는 서로 다른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로 쪼개져 귀족들이 통치하였으며, 이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이들은 무역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부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예술과 과학자들을 후원해주었다. 유명한 귀족 가문들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자 가문, 제노바의 도리아 가문, 베네치아의 모체니고 가문과 바바리고 가문, 페레라의 에스테 가문, 만투아의 곤자가 가문 등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귀족 가문들의 비호 아래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이탈리아 내로 축적하였으며, 이들의 후원을 받아 여러 예술가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예술가들은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는데, 가장 유명한 자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텔로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레온 바티스티 알베르티, 안드레아 팔라디오, 도나토 브라만테 등의 건축가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 이후, 교황들은 아무래도 베드로가 순교한 로마가 더 정통성 있는 교황좌라고 판단하여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가 3년 간의 여행을 거쳐 다시 로마의 교황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르티노 5세는 이 3년 간의 여정 동안 여러 이탈리아 도시들을 거쳤고, 이탈리아 반도를 서방 기독교의 최고 중심부로 다시 재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자금을 대거나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였고, 교황과의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기,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인 콘클라베와 같은 행사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지배권과 서방교회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내기 위한 유력 가문들 사이의 암투로 전락하였으며, 수많은 비밀 거래들과 약조들이 이 사이에서 오고 가곤 하였다. 1439년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코시모 데 메디치가 중재한 피렌체 공의회에서 만나 동서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453년에는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의 군대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수성하게 돕기도 하였는데, 결국 오스만 제국군의 막대한 포력을 견디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이 곳에 살던 그리스 학자들이 터키를 피하여 서방 세계로 이주하였다. 이 때에 오랫동안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 세계의 인본주의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교황 피우스 2세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같은 인본주의자들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상적인 인본주의 세계를 건설하려 우르비노나 피엔자 등의 도시들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철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을 집필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하여 설파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사학자 레오나르도 부르니는 인류 역사를 고전기, 중세기, 근대기로 나누며 며 최초의 현대적인 역사학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항해시대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의 탐험가들과 항해가들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기존의 무역로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을 피하여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서양 국가들에게 접근하여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설득당한 국왕들이 이들에게 배와 선원들을 후원해주고 대대적인 해상 탐험 원정이 일어나며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 개척지를 건설하는 것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이이다. 1497년의 존 카봇은 영국의 후원을 받았으며, 처음으로 '새로 발견된 땅'을 인지하고 북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기도 하였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사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나 인도가 아니며, 지금까지 사람들이 몰랐던 제 4의 대륙이라고 주장하며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조반니 데 베라차노는 아메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 지역을 1524년에 최초로 조사한 유럽인이기도 하였다.

     
    교황 피우스 5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롬바르디아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즉 베네치아, 나폴리, 피렌체, 밀란, 교황령은 서로 모여 이탈리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때 피렌체의 로렌조 데 메디치가 이탈리아 동맹의 가장 큰 권력가였으며, 또한 르네상스 시기 가장 열성적으로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파치 음모 사건과 투르크의 침략을 견뎌 내고 이탈리아 동맹을 유지하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이 이탈리아 동맹은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이탈리아에서는 발루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1500년대에 이탈리아는 유럽 각국들이 간섭하며 전쟁이 일어나고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며 유럽의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번영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교황들도 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 달랐는데, 율리오 2세의 경우에는 최대한 외국 군주들의 간섭을 줄이려 한 반면 바오로 3세는 외국 군주들 사이를 중재하여 평화를 이끌어내고자 한 경우도 있었다. 이 때 메디치 가문에서 선출된 레오 5세나 클레멘스 7세 등의 교황들은 가문의 입맛에 맞추어 신교 세력들을 적대하였으며 가문과 개인의 부를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남부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까지도 교황령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반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신교 세력들의 비판을 무마하고 천주교회를 개혁해 보려 하였다. 이 때 발생한 주요 사건에는 트렌트 공의회, 엘리자베스 1세의 파문, 레판토 해전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그레고리 천문대의 건설, 그레고리 달력 반포, 마테오 리치를 파견하여 중국에 예수회 선교사들을 보낸 사건, 프랑스 종교 전쟁, 투르크와의 장기전,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 교황령의 린체이 아카데미(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속해있었다.)의 설립, 30년 전쟁, 대튀르크 전쟁 동안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의 주도 하의 마지막 신성 동맹의 결성과 같이 유럽사와 세계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매우 많이 일어났다.

    이탈리아는 1500년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1600년대와 1700년대에는 대서양의 노예 무역에서 소외되며 점차 경제가 쇠퇴하였다.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 이후에 이탈리아 남부는 스페인 부르봉 가문에게, 북부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레인 왕가에게 지배당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과 전쟁을 치를 때에, 상대적으로 프랑스에 가까웠던 이탈리아 북부는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여 여러 자매공화국들로 찢어졌고, 나중에는 프랑스 제1제국의 하위 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이 들어섰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지방에서는 나폴레옹과 혈연 간이었던 조아킴 뮈라가 나폴리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쇠퇴하자 이같은 권력구도도 무너졌고,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을 다시 18세기 후반으로 되돌리기로 결정하였다. 허나 나폴레옹 통치기에 뿌려진 자유와 평등과 같은 혁명의 유산들은 뿌리뽑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초에 이탈리아는 다시 혼란기에 돌입하게 된다.

     
    주세페 가리발디
    통일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몇 천년 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쪼개져 있었는데, 결국 1800년대 들어서야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사보이아 왕가가 힘을 합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왕국이 설립되었다. 1815년의 빈 회의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통일의 움직임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하였고 외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들을 모두 독립시켜, 하나의 국가 아래에 통일시키자는 의견이 떠올르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가장 대표적인 급진주의자가 바로 주세페 가리발디였는데, 그는 비밀 결사조직 카르보나리 당의 일원이자 1830년대에 떠오른 청년 이탈리아당의 창립자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공화정을 만들고 싶어하였으며,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하였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청년 이탈리아당에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매우 많았고,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며 가리발디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이 때 이탈리아 북부를 통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가와 사르네냐 왕국 정부를 이끌던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도 통일 이탈리아 국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1848년에 유럽을 휩쓸은 1848년 혁명의 열기를 이어 처음으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1차 독립전쟁을 선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55년, 사르데냐 왕국은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편을 들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카보우르 백작의 통일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강대국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1859년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차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에게서 해방시켰다.

    1860년과 1861년 사이, 가리발디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을 통일하였으며, 사보이아 왕가는 로마와 교황령 일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중부를 완전히 점령하여 통일하였다. 1860년 10월 26일, 테아노에서 사보이아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가리발디가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고, 합의가 이루어져 마침내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전체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가리발디는 본디 공화정을 바랐던 자신의 꿈을 접고 사보이아 왕가를 지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될 수 있었다. 카보우르 백작도 가리발디가 통일한 이탈리아 남부를 1861년 3월 17일에 샤르데냐 왕국에 편입시키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861년 3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왕국의 첫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왕국의 수도를 피렌체로 옮겼다. 이 때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에 기여한 4명의 인물들(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가리발디, 카보우르 백작, 마치니)를 건국의 아버지라 부른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왕정기

    새롭게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수립 직후 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샤르데냐 왕국의 헌법이 이탈리아 전역에 확대되어 적용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보장을 일부 하였으나, 선거권을 빈자들과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지 않는 등 나름대로 문제도 있었다. 새로운 왕국은 입헌군주정이었으며, 진보적인 세력이 장악한 의회에서 국정을 맡아 처리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산업화가 일어나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나, 중부와 남부에서는 여전히 산업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농촌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이탈리아 사회당이 기존의 진보와 보수 정당들에 도전하며 점차 힘을 키워갔다.

    19세기 초반, 이탈리아는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화하며 식민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899년 11월에서 1901년 9월까지는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01년 9월 7일에는 청나라가 강제로 이탈리아에게 톈진의 조계를 할양하였으며, 1902년 6월에는 공식적인 이탈리아 영토로 포함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1913년에는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이탈리아에서는 지오반니 지올리티 총리가 1892년과 1921년 사이에 5번이나 연임하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현대화를 본격적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을 맺었으나, 1915년에 영토를 확장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변절하여 연합 세력에 동참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의 주요 4개국으로 떠올랐고, 전쟁 승리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세계 대전의 과정은 상당히 고난하였는데, 이탈리아 군대가 알프스 산맥에서 교착전에 빠져 막대한 인명, 물적 피해를 보며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후 군대를 재조직하고 대대적인 모병을 거치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그라파산이나 피아베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1918년 10월에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이탈리아 전선에서 승리하며 전쟁을 일단락지었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치명타를 입고 몰락하였으며, 2주 후에는 세계 대전도 종결되었다.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 동안 65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왕국은 재정적으로 파산 위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국제 연맹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영구적으로 얻어내고 국제적인 위상도 어느 정도 올랐으며 전쟁 이전 요구했던 영토들도 상당수 얻어내었으나, 달마티아 지방을 얻어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전쟁이 '실패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사회는 불신에 휩싸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의 영토였던 리예카를 원래 자신들에게 약속된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격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도 하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즘 독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사회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의견들을 내세우며 군중들을 부추겼다. 실례로 1919년 3월에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노동자의 공장 운영, 거리투쟁, 공장 생산 거부 등의 강력한 행동이 개시되었는데, 이는 남부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노동자층의 계급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1] 이러한 민중들의 단결을 두려워한 지주, 군벌과 전통적인 자유주의 세력들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며 국가주의를 내세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0월,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이 로마 진군을 실시하였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뻔 하였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결국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성공하였다. 이후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단체들을 불법으로 규정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도 심각하게 제한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무솔리니의 행보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결국 후에 히틀러의 나치당과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에 영감을 주는 참사를 낳았다.

    1935년, 무솔리니 주도 하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입하였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설립하였다. 이 행동은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탈리아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하며 국제적인 행보를 넓혀갔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합병하였으며, 이후 약 몇십여년 동안 사실상 보호령으로 두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에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령 소말릴란드, 이집트, 발칸 반도, 동부 국경으로 군대를 투입하였다. 허나 이탈리아 군대는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소련 국내에서 패배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체결된 빌라 주스티 정전 협약으로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합병할 수 있었다. 파시즘 기간 동안, 무솔리니는 이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이탈리아화'시키려 하였으며 슬라브어, 학교, 정당, 문화를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탈리아는 전쟁 기간 동안 초법적인 살인 만행을 저질렀으며, 유대인과 슬로베니아인 등의 민족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이탈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인종 청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다만 독일과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는 전후 상대적으로 적게 기소되었고, 처벌도 훨씬 적었다. 연합국 군대는 1943년 7월부터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이탈리아 본토 침공이 시작되자, 무솔리니는 얼마 가지 못하고 실각하였으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파시즘 대평의회 의원들 대다수의 동의를 얻어 권좌에서 쫓겨났다. 9월 8일에는 카시빌레에서 연합국과의 휴전 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직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의 도움을 받은 나치 독일 군대가 빠르게 국경 내부로 들어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였다. 이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세계 대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북중부를 장악한 나치 독일과 남부에서부터 서서히 밀고 올라가는 연합국 군대 사이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독일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고, 무솔리니를 구출해내어 이 공화국의 대표로 세움으로써 나치 독일의 괴뢰국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남부 지방에 있던 몇몇 이탈리아 군대들은 이탈리아 공동교전군을 조직하여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다. 다만 상당수의 이탈리아 군대는 여전히 무솔리니와 독일에게 충성을 바쳤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편에서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투를 계속하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휴전 협정 이후부터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사회 전반적인 반파시즘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군대와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1945년 4월, 독일과 히틀러의 패색이 만연해지자 무솔리니는 북쪽으로 도주하여 목숨을 건지려 하였으나, 결국 잡혔고 코모 호수 인근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후 밀라노로 옮겨졌고, 공공장소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로 대중들에게 전시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일부나마 치르었다. 1945년 4월 29일에는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독일 군대가 마침내 항복하며 공식적인 교전은 모두 끝났다. 이 전쟁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이 사망하였으며, 이탈리아 경제는 파탄 수준에 이르러 1944년의 1인당 GDP는 20세기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
    공화정

    이탈리아는 1946년 6월 2일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이 날을 공화국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인 움베르토 2세는 왕위에서 퇴위하도록 강요당했고, 사보이아 왕가는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 1947년에 이탈리아 평화 협정이 맺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베네치아줄리아가 다시 유고슬라비아에게 돌아갔으며 이탈리아가 해외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도 모두 빼앗기면서 이탈리아 식민 제국이 종말을 맞았다. 1950년에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1960년 7월 1일까지 이탈리아의 행정력 아래에 국제 연합의 신탁통치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돌입한 냉전 시기에서, 특히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이탈리아가 선거를 통하여 다시 극단적인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려움은 중도적인 성향의 기독교민주당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소멸되었다. 1949년에 이탈리아는 NATO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마셜 플랜의 도움을 지대하게 받아 1960년대 후반까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보이며 '경제 기적'을 일구어냈다. 1957년에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 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것이 나중에 발전하여 1993년에 유럽 연합으로 성립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는 납의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1973년의 석유 파동 이후의 경제적인 위기와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냉전의 격화에 따른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갈등으로 이탈리아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납의 시기는 기독교민주당의 정치인이자 총리였던 알도 모로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암살당하며 그 정점을 찍었고, 또한 네오 파시스트들이 볼로냐 대학살을 일으키며 85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1945년 이래 처음으로 기독교민주당이 여당의 지위를 빼앗기며 타 정당들에게 주도권을 내주었다. 하나는 공화당의 조반니 스파돌리니 총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의 베티노 크락시 총리였다. 다만 기독교민주당은 여전히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정국의 최대 주도 세력이기도 하였다. 크락시 총리의 재임기에 이탈리아는 다시 경제가 회복세를 띠기 시작하였고, 세계에서 5번째가는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G7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허나 크락시 총리는 지나친 정부 확장 재정 정책을 운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빛은 GDP의 100%를 넘기고 말았다.

    1992년과 1993년 사이, 이탈리아 정부는 이전에 시칠리아의 마피아들을 집단으로 처벌한 막시 재판의 후폭풍을 호되게 겪었다. 마피아들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여러 테러 공격을 일으켰으며, 이때문에 정부는 반테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는 2번의 주요 폭탄 공격으로 판사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1993년에는 로마, 밀라노,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주요 대도시의 관광지들에 일부러 폭탄 테러를 시행하기도 하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하여 10명이 사망하였으며, 93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역사적인 문화재들도 다수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천주교회는 공개적으로 마피아를 책망하였는데, 직후 교회 2곳이 테러를 당했고 반마피아 성향의 성직자들이 로마에서 죽은채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초, 이탈리아는 정치적 극단화, 막대한 공공부채, 엄청난 부정부패 등에 실망한 국민들이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때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은 정당들이 없었으나, 그 와중에도 특히 50년 동안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이 특히 부정부패가 심했다. 결국 기독교민주당은 여러 분파들로 쪼개졌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결성하였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중심의 중도 우파 세력과 로마노 프로디 중심의 중도 좌파 세력이 연정을 만들어 정부를 운영하였다.

     
    주세페 콘테 총리

    한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08년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기의 여파로 인하여 결국 2011년에 사임하였고, 그가 이끌던 보수 정부는 마리오 폰티 중심의 진보 정부로 대체되었다. 2013년 총선 이후, 이탈리아 민주당 부대표였던 엔리코 레타가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우파, 좌파를 모두 참여시킨 대연정 정부를 구성하였다. 다만 2014년에 새로운 민주당 당대표 마테오 렌치의 도전을 받고 결국 사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마테오 렌치가 총리직으로 올랐고, 이탈리아 상원을 폐지하거나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개헌과 같은 개혁적인 조치들을 추진하였다. 다만 이 개혁 조치는 12월 4일에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고 말았고 마테오 렌치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후 파올로 젠틸로니 외무장관이 대신 새로운 총리에 올랐다.

    2010년대 유럽은 점차 난민들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썩기 시작하였는데, 이 난민들 상당수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이탈리아였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이탈리아는 7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수용하였으며 이들중 대부분이 아프리카 사하라 지방에서 온 자들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대중들의 크나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정계에서 극우 세력들이 득세하고 유럽 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2018년 총선에서는 포퓰리스트 정당인 오성운동과 극우 계열의 북부동맹이 크게 약진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학 교수였던 주세페 콘테가 새로운 총리에 당선되었다. 주세페 콘테 총리는 이 두 정당을 모아 포퓰리스트 연정을 구성하여 내각을 이끌어나갔다. 허나 14개월 이후 북부동맹은 주세페 콘테 총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성운동은 어쩔 수 없이 중도 좌파 세력들과 연정을 이루어 국정을 계속 담당하였다.

    2020년, 이탈리아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직격탄을 맞았고, 주세페 콘테 총리는 3월부터 5월까지 국가 격리 정책을 내려 전염병의 전파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이 정책은 대중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 이탈리아 건국 이후 최대의 인권 제한 조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3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며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 19로 사망자를 많이 낸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았으며,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며 이탈리아 경제를 침체의 늪에 빠뜨렸다.

    살림지식총서《안토니오 그람시》/김현우 지음/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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