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xt of 브르타뉴반도

브르타뉴반도(프랑스어: Bretagne)는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반도이다. 대서양을 향해 크게 튀어나온 모습을 하고 있다. 북쪽은 영국 해협, 남쪽으로는 비스케이만을 접하고 있다.

브르타뉴는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켈트어파 계열의 독자적인 언어인 브르타뉴어를 사용한다. 근세 이전까지 단일한 구역으로 묶여 있었던 브르타뉴 지역은 오늘날 피니스테르주, 코트다르모르주, 일에빌렌주, 모르비앙주의 네 개의 르트망으로 나뉘어 있다.

More about 브르타뉴반도

Basic information
  • Internet domain .bzh
Population, Area & Driving side
  • Population 4687381
  • 영역 34022
기록
  • 선사 시대  카르나크 열석

    브르타뉴반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브르타뉴에 살았던 가장 오래된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이다. 이들의 인구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서유럽 전역에서 발견되는 네안데르탈인들과 유사한 문화를 지녔지만, "콜롬바니안"이라 불리는 브르타뉴 네안데르탈인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1]

    호모 사피엔스가 브르타뉴반도에 나타난 것은 약 3만 5천년 전의 일이다. 이들은 샤텔페롱 문화와 유사한 석기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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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 시대  카르나크 열석

    브르타뉴반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브르타뉴에 살았던 가장 오래된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이다. 이들의 인구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서유럽 전역에서 발견되는 네안데르탈인들과 유사한 문화를 지녔지만, "콜롬바니안"이라 불리는 브르타뉴 네안데르탈인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1]

    호모 사피엔스가 브르타뉴반도에 나타난 것은 약 3만 5천년 전의 일이다. 이들은 샤텔페롱 문화와 유사한 석기를 사용하였다.

    갈리아  코르즐에 세워진 로마 시대 마르스 신전

    원사시대 브르타뉴반도에는 켈트족에 속하는 다섯 부족이 살았다.[2] 이들은 오늘날 도서 켈트어군에 속하는 브리튼 제도의 여러 켈트 부족들과 경제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3]

    브르타뉴 지역은 기원전 51년 무렵 로마 공화정의 일부로 편입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13년 무렵에는 로마의 속주 가운데 하나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켈트족의 도시들은 로마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당시의 주요 도시로는 콘다테(렌), 보르지움(카라이-플로게), 다리오리툼(반), 콘데빈쿰(낭트)와 같은 도시들이 있다.[4]

    3세기에 들어 브르타뉴는 프랑크족, 알레만니와 같은 게르만족들과 여러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역 경제는 붕괴되고 렌, 낭트, 반과 같은 도시들은 버려지게 되었다.[4]

    브리튼인

    4세기 말 오늘날의 웨일스와 영국 남서 반도에 살던 브리튼인들이 아르모리카로 이주해 왔다. 연원은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모여든 브리튼인과 앙주 지역 유력자들은 코난 메리아독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앵글로-색슨의 영국 도래는 브리튼 지역에 살던 켈트 부족들을 압박하였고, 상당수의 브리튼인들은 브르타뉴를 비롯한 영국해협 남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5] 840년 무렵 브르타뉴의 노미외는 브르타뉴 공국의 첫 번째 공작이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신하가 되었다.[6]

    중세

    중세 시기 브르타뉴반도는 브르타뉴 공국의 영지였다. 브르타뉴 공국은 형식상 프랑스의 신하이자 영토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자치를 행사하였다.[7] 브르타뉴 공국은 851년 젱랑 전투를 통해 프랑스에서 독립하여 브르타뉴 왕국이 되기도 하였으나, 942년 루이 4세에게 항복하고 다시 공국이 되었다.

    9세기 무렵부터 바이킹이 영국, 노르망디, 브르타뉴 등의 북해 연안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브르타뉴 공국은 노르망디, 앙주와 같은 동쪽 영토를 잃었다. 바이킹은 브르타뉴 남쪽 보르뉴만 지역에 염전을 만들고 유럽 각국에 소금을 유통하기도 하였다.[8]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할 당시 브르타뉴 공국은 노르당디의 동맹군으로 참전하였다.[9]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벌어지자, 이 여파로 브르타뉴 공국의 계승권을 놓고 전쟁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은 몽포르 가와 프랑스 국왕의 후원을 받은 블루아 가 사이의 전쟁에서 몽포르가 승리하였고 이는 백년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 왕가는 이를 계기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시작하였으나, 브르타뉴 공국은 15세기까지 여전히 독립적인 자치를 행사하였다.[11]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 왕가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여 공익 동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12]

    프랑스의 합병

    1488년 브르타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있었던 광기 전쟁이 끝났다. 이 결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허락 없이는 자신의 딸 안의 혼처를 정할 수 없었다. 1488년 프랑수아 2세가 낙마로 급사하자 안은 브르타뉴 공국의 영주가 되었고, 1490년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하였다. 샤를 8세는 랭을 포위하고 결혼의 취소를 요구하였다. 샤를 8세는 안과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취소시키고 자신이 안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 샤를 8세가 후사 없이 죽자 왕위는 루이 12세에게 넘어갔고, 안은 루이 12세와 재혼하였다. 안은 루이 12세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고 장녀인 클로드는 발루아 가의 프랑수아와 결혼하였다. 1514년 안이 죽자 브르타뉴 공작의 지위는 딸인 클로드가 계승하였다. 루이 12세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와 재혼하였으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사 없이 사망하였고, 프랑스의 왕위는 클로드의 남편인 프랑수아에게 넘겨졌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된 그는 1532년 브르타뉴와 프랑스의 동군연합을 천명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브르타뉴에 대해 소금에 대한 세금의 면책 특혜를 제시하였는데, 당시 소금세는 프랑스 내에서 악평이 높은 세금이었다.[13] 이후 앙시앵 레짐 시기 프랑스의 국왕은 브르타뉴 공국의 영주를 겸했지만, 브르타뉴는 독자적인 자치권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의 궁정 내에서 브르타뉴 귀족들은 프린스 에트랑제(Prince étranger, 외국의 귀족) 신분을 지녔다.

    근세 프랑스 시기 브르타뉴는 프랑스 해양 무역로의 주요 거점이었다.

    1789년 이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 공국은 해체되고 브르타뉴는 다섯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앙시앵 레짐 시기에 주어졌던 염세 면제 혜택 역시 철회되었다.[14] 혁명 후 3년이 지나자 브르타뉴는 왕당파와 카톨릭 세력의 반혁명 거점이 되었다. 브르타뉴의 반혁명 활동은 18세기 말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15]

    19세기에 들어 브르타뉴는 무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많은 수의 주민들이 프랑스 내의 다른 레지옹으로 이주하였다.

    Nathalie Molines and Jean-Laurent Monnier (1993). Le " Colombanien ": un faciès régional du Paléolithique inférieur sur le littoral armoricano-atlantique. 90. Bulletin de la Société préhistorique française. p. 284. Venceslas Kruta (2000). Les Celtes, Histoire et Dictionnaire. Robert Laffont. p. 427. ISBN 2-7028-6261-6. Julius Caesar.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VII. p. 75. ↑ 가 나 Université de Rennes II (ed.). "Archéologie classique" 보관됨 2013-04-12 - archive.today. Retrieved 26 February 2013. Léon Fleuriot, Les origines de la Bretagne: l’émigration, Paris, Payot, 1980. Smith, Julia M. H. Province and Empire: Brittany and the Carolingi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p.80–83.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정종화 역, 《역사의 위대한 떨림》, 민음사, 2002년, ISBN 978-89-3742-489-2, 319쪽 마크 쿨란스키, 이창식 역, 《소금 - 인류사를 만든 하얀 황금의 역사》, 세종서적, 2003년, ISBN 8407-129-2, 131쪽 조셉 커민스, 송설희 김수진 역, 《만들어진 역사》, 말글빛냄, 2008년, ISBN 978-899211-430-1, 52쪽 War of the Breton Succession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6년, ISBN 978-89-3680-352-0, 168쪽 Paul Murray Kendall, Louis XI: The Universal Spider (New York: W. W. Norton and Company, 1971), 143. Constance De La Warr, A Twice Crowned Queen: Anne of Brittany, Peter Owen, 2005 소금에 부가되는 염세가 다시 폐지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 마크 쿨란스키, 이창식 역, 《소금 - 인류사를 만든 하얀 황금의 역사》, 세종서적, 2003년, ISBN 8407-129-2, 252쪽 Chapter 53: Counter-Revolution In Brittany — Assassination of Ma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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