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칼

티칼(Tikal)은 과테말라 페텐 주의 열대우림 지대에 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이다. 마야어로는 약스 무탈이라고 불렸을 것이라 추정한다. 마야 문명의 도시들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도시이며, 과테말라 북부 페텐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과테말라 티칼 국립공원 내부에 소재하며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티칼은 고전기 마야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하여 주변 도시들을 지배하던 거대한 왕국이었다. 도시의 건립 연대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마야 고전기인 200년에서 900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전성기에는 마야 문명 전체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통합한 강국이었으며 메소아메리카 지방 전체를 통치하거나 영향력을 미쳤다. 이 시기 티칼의 인구는 무려 9만 명을 넘기도 하였다. 다만 멕시코 계곡에 있는 테오티우아칸의 국력에는 미치지 못하여 기원후 4세기 경 테오티우아칸과 전쟁을 벌여 패한 적이 있다. 고전기 후기 경에 지어진 새로운 신전들이 발굴되지 않고, 왕궁들이 이 시기에 불탄 흔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전기 후기부터 점차 도시가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 말에는 점진적인 인구 감소와 함께 연이은 전염병, 흉작으로 인하여 거의 완전히 버려진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티칼은 한때 마야 지방 전체를 통치했던 거대한 왕국이었던 만큼, 이 곳에서는 그 어떠한 마야 유적지보다도 많은 유적들이 존재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곳에서 왕의 무덤, 거대한 신전 피라미드, 농경지의 흔적들을 다수 발굴한 바 있다.

선고전기

티칼 인근에서 발견되는 가장 초기의 농경지 유적은 기원전 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땅에 묻힌 봉인된 무덤들에서 기원전 700-400년 경에 만들어진 도자기들이 발굴된 바 있다. 티칼은 선고전기 후기부터 주요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400-300년 경에 피라미드 신전들과 궁전들이 지어졌다. 다만 이때의 티칼은 마야 문명권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군소 도시였고, 북부의 엘 미라도르나 나크베와 같은 거대한 마야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이 당시 티칼은 마야 중북부에 큰 영향을 끼쳤던 치카넬 문화권에 속해있었다. 참고로 치카넬 문화권은 유카탄 반도 전체와 북동부 과테말라, 벨리즈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문화권이었다.

차카넬 문화권 시기 지어진 피라미드 신전 2개는 건물 위에 건물을 또 덧씌우는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돌로 아치형 입구를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피라미드 외벽의 정교한 벽화에는 검은색, 노란색, 붉은색 등으로 다채롭게 칠해진 문서를 들고 있는 사람 2명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세기 후반들어서 귀족들의 무덤이 차차 생겨나기 시작했고 티칼은 엘 미라도르, 나크베와 같은 거대 도시들이 쇠락함에 따라 그 자리를 채우며 북부 마야 지방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거대한 왕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선고전기 후기에 이르자 이자판 양식과 태평양 연안 지방들의 도시 문화가 티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티칼 피라미드들의 벽화와 아크로폴리스 지대에 있는 조각상들로 알아볼 수 있다.

고전기 초기

마야 문명의 왕실들은 모두 티칼과 밀접한 관력이 있다. 상형문자 기록에 의하면 티칼의 왕조는 '약스 엡 쑤크'라는 전설적인 인물로 인하여 창건되었으며, 약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전기 초기, 마야 문명의 중심은 2개의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티칼과 칼라크물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모든 도시들은 티칼과 칼라크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선고전기에 번영했던 엘 미라도르와 같은 도시들이 멸망함에 따라 티칼은 상대적으로 더더욱 강성해졌고, 이후 티칼의 영향을 받아 주변 마야 도시들도 왕조들이 들어섰고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며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티칼의 피라미드들에 새겨져 있는 상형문자들을 해독한 결과, 티칼은 칼라크물, 우아삭툰, 카라콜, 나란조와 같은 인근 도시들과 연합을 맺기도 하고 경쟁을 벌이기도 하며 성장하였다. 고전기 초에 카라콜에게 패한 티칼은 한동안 마야 문명의 중심 도시라는 명예를 뺏겼고, 대신 카라콜은 남부 지대의 중심 도시로 급부상했다. 또한 우아삭툰과도 상당한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우아삭툰의 비문들에 티칼에서 잡아온 포로들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후 317년, 남자들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관습이 깨지고 '우넨 발란' 여왕이 등극하였다.

 
티칼
티칼과 테오티우아칸

기원후 200년, 테오티우아칸은 티칼에 대사를 두고 간접통치하였다. 티칼의 14대 왕은 '착 톡 이카악'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거주할 거대한 궁전들과 사원들을 지어 부를 과시하였고, 이 것이 나중에 중앙 아크로폴리스의 기반이 되어 후대의 왕들의 궁전으로 발전했다. 착 톡 이카악이 378년 1월 14일에 살해당했다는 것을 빼고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같은 날 '시야 칵'(한국어로는 '불의 탄생'을 의미한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군대를 이끌고 서쪽에서 티칼로 들어왔고, 자신을 '서부의 군주'라고 자칭했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있다. 시야 칵은 아마도 전통적인 마야의 귀족이 아니라 멕시코 계곡의 테오티우아칸의 장군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시야 칵을 상징하는 상형문자가 올빼미를 지고 있는 창을 든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상형문자는 이전 시기의 마야 비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테오티우아칸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형문자이다. 올빼미와 창을 든 남자는 테오티우아칸에서 군주를 상징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를 토대로 고고학자들이 추정한 결과, 테오티우아칸의 군대가 티칼을 침략했고 왕을 죽인 후 자신들의 혈통의 지배자를 새롭게 옹립했다고 볼 수 있다. 시야 칵 장군은 티칼을 강력히 장악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이는 테오티우아칸의 군대가 티칼을 점령한 이후에도 몇몇이 남아 군대를 주둔시키고 시야 칵의 왕위를 지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야 칵은 티칼뿐만 아니라 우아삭툰과 같은 주변 도시들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우아삭툰으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왕위에 올랐다. 한편 티칼의 왕위는 시야 칵의 아들이었던 '약스 누운 아이인 1세'가 차지했으며, 379년 9월 13일에 즉위식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그는 47년동안 티칼을 다스렸으며, 시야 칵이 우아삭툰의 군주로 살아있는 동안 그의 충실한 조언자로서 활동했다. 약스 누운 아이인 1세는 이전 토착 왕조의 왕이었던 착 톡 이카악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이를 통하여 자신의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티칼의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리오 아줄'이라 불리는 소규모 도시가 약스 누운 아이인 1세의 통치기에 티칼 군대에게 점령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티칼 방어의 전초기지로 변모했고, 북부의 적대적인 도시들로부터 티칼을 방어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또한 카리브해로 통하는 교역로의 통행 도시로 기능하기도 했다.

약스 누운 아이인 1세와 그 혈통은 테오티우아칸에서 들어온 외부인이었으나, 그와 그의 후손들은 빠르게 마야에 동화되었다. 티칼은 테오티우아칸과 활발한 교역을 하며 마야 지방의 핵심적인 도시로 떠올랐고, 테오티우아칸에게 정복당한 이후에는 오히려 그 힘을 키워 페텐 분지 북동부 지방을 통일하였다. 한때 티칼의 경쟁자였던 우아삭툰은 티칼 왕국에 흡수되었다. 5세기 중반에 이르자 티칼은 사방으로 최소 25km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티칼과 코판

5세기에 티칼의 영향력은 남쪽으로까지 뻗어갔고, 이때 식민도시 코판을 세웠다. 코판의 창립자는 '키니크 약스 쿠크 모'라는 인물로, 티칼의 왕실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도시 코판의 위치 자체는 마야 문명권에 들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코판은 티칼의 정복 사업의 일환으로 처음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키니크 약스 쿠크 모는 426년 12월에 코판에 처음 도착했으며,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그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그가 유년기를 티칼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무덤은 테오티우아칸의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키니크 약스 쿠크 모는 테오티우아칸 전통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상형문자에는 키니크 약스 쿠크 모를 '서부의 군주'로 칭했으며, 이는 테오티우아칸에서 건너온 티칼의 정복자 시야 칵의 호칭과 동일했다. 426년 후반, 코판은 티칼의 도움을 받아 인근에 도시 퀴리구아를 새롭게 세웠다. 티칼은 코판과 퀴리구아를 새롭게 개척함을 통하여 마야 동남부 지역에 영향력을 뻗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코판과 퀴리구아, 티칼은 약 300여년 동안 상호작용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도왔다.

마야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도시인 티칼과 칼라크물의 경쟁은 6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시기부터 티칼과 칼라크물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주변의 도시들과 연합을 맺기 시작했으며, 끊임없는 전쟁과 전투들을 벌이며 상대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티칼과 칼라크물의 왕들은 자신들을 다른 중소 도시의 왕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대군주'라는 의미의 '카룸테'라는 칭호를 그들의 호칭으로 사용했다.

6세기 초, 티칼에는 여왕이 등장했다. 현대 고고학계는 그를 '티칼의 귀부인'이라고도 부른다. 티칼의 귀부인은 선왕 '착 톡 이카악 2세'의 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여자라는 한계로 인하여 단독으로 통치한 적은 없고, 항상 남성 공동 통치자와 함께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첫 공동 통치자는 '카룸테 발람'으로, 티칼의 강력한 장군이었으며 사실상 티칼의 19번째 왕으로 대우받았다. 오히려 티칼의 귀부인은 왕 계보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카룸테 발람이 죽은 이후 '새 발톱'이라는 이름의 새 공동 통치자가 즉위했으며, 선례와 마찬가지로 티칼의 20번째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고전기 후기
 
칼라크물 유적
티칼 공백기

6세기 중반, 인근 도시 카라콜이 칼라크물과 연합하여 티칼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때를 고전기 초기의 끝으로 본다. '티칼 공백기(Tikal Hiatus)'란 6세기와 7세기 후반 사이의 기간으로, 티칼 유적에서는 이 시기에 쓰여진 상형문자 비문이나 건축된 건물들을 찾아볼 수 없다. 6세기 후반 경, 티칼에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거대한 재앙이 닥쳤고, 이 시기에는 어떠한 비석도 세워지지 않았으며 신전들도 대거 무너졌다. 이 재앙은 고고학자들이 땅 속 깊이 파묻힌 비석을 해독하기 전까지 정확히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연구 결과 이 때 카라콜과 칼라크물 연합군대가 562년쯤에 티칼을 정복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티칼의 왕은 사로잡혔고, 인신공양으로 제물로 바쳐졌다. 카라콜에 있는 비석들에는 티칼이 이 전쟁에서 패한 뒤 얼마나 처참한 수준으로 전락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티칼의 패배는 도시 자체를 멸망시키지는 않았으나, 티칼의 힘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카라콜은 이 승리를 통하여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티칼의 인구 일부를 강제적으로 데려가 자신들의 노예로 삼았다. 이 시기 동안 티칼의 군주들은 권력이 매우 약했다. 한편 칼라크물은 티칼의 쇠락에 반비례하여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티칼 공백기는 고고학계가 고전기를 초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티칼과 도스 필라스

629년 티칼은 식민도시인 도스 필라스를 세웠다. 도스 필라스는 티칼 남서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도시로, 강을 통한 교역로를 통제하기 위한 군사 전초 기지의 용도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티칼 왕의 형제였던 '발라즈 찬 카이이'가 635년에 4살의 나이로 도스 필라스의 왕위에 올랐고, 이후 티칼의 충실한 신하로 봉사했다. 이후 20년 동안 도스 필라스는 칼라크물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고, 결국 발라즈 찬 카이이는 칼라크물에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허나 발라즈 왕은 제물로 바쳐지는 대신, 칼라크물에 충성한다는 조건으로 도스 필라스의 왕으로 재임명되었고 657년에 티칼을 공격하여 당시 티칼의 왕이었던 '누운 우졸 차악'을 도시를 버리고 피난가는 신세로 만들기도 했다. 허나 발라즈는 티칼의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요구하지 않았고, 도스 필라스의 왕으로 남았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티칼이 672년에 도스 필라스를 역습했고, 발라즈 찬 카이이는 생애의 마지막 5년을 도망자 신세로 보내게 된다. 한편 칼라크물은 엘 페루, 카라콜, 도스 필라스와 같은 도시들을 이용하여 티칼을 포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682년, 자소우 찬 카이이 1세가 120년 만에 티칼에 새로운 신전을 세우고 다시 '카룸테'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로서 티칼 공백기가 끝났다. 그는 티칼을 강력하게 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고, 칼라크물과의 전쟁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칼라크물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칼라크물은 이 이후로 기나긴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칼라크물은 이 시기 이후 승리를 기념하는 건축물을 단 1개도 세우지 못했다.

테오티우아칸 이후 티칼

7세기 경에는 마야 문명 지역에서 그 어떠한 테오티우아칸의 영향력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신전들에 새겨진 벽화들고 승전 기념비석들은 모두 테오티우아칸의 양식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테오티우아칸은 여전히 문명의 선진도시로 여겨졌다. 자소우 찬 카이이 1세와 그의 후계자인 이킨 찬 카이이 왕은 칼라크물과의 적대관계를 지속했으며, 티칼 공백기 동안 무너졌던 티칼의 명성을 회복하였으며 옛 영광을 되찾아갔다. 그들은 티칼 왕국의 국경을 페텐이트사 호수까지 확장했기도 하다. 현재 관광객들이 티칼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웅장한 건축물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738년에 코판의 동맹 도시이자 티칼의 식민지였던 퀴리구아가 배신하고 칼라크물의 편으로 돌아섰다. 퀴리구아는 코판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자치권을 획득하고 티칼을 적대했다. 이는 칼라크물의 티칼 남부 지역을 약화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때문에 마야 남부 지방의 정치 균형이 무너졌으며 코판은 이후 점진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8세기에는 티칼의 지도자들이 다른 도시들에서 신전 건축물들을 뜯어와 북부 아크로폴리스에 세웠다. 8세기와 9세기 초반에는 티칼의 활동이 점차 뜸해졌으며 인구도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장대한 신전들이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이 시기의 왕들에 대한 기록은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고전기 말기

9세기에 본격적으로 마야 고전기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모든 마야 도시들에서 인구가 줄어들었으며, 몇몇 도시는 버려지기도 했다. 끊임없는 내전이 일어났고 이는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도시에 밀집되어 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문에 집약적으로 좁은 구역에서 많은 농작물들을 재배하는 형식의 농업이 행해졌으며, 이는 열대우림 토지의 낮은 생산성과 맞물리며 환경 파괴로 이어졌다. 신전 건축은 9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졌다. 달력의 순환을 기념하는 행사들도 더이상 열리지 않았으며, 도시의 중앙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약 60여 년간의 소규모 공백기가 이어졌고, 왕들은 제대로 된 권력을 갖지 못했다. 이 시기, 티칼의 통치를 받았던 작은 도시들은 점차 그들의 지도자를 벽화에 장식하고 독자적인 상형문자와 상징들을 쓰는 등 티칼의 영향력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으며 티칼은 이러한 방종행위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849년, 티칼의 왕 '쥬얼 카이이'가 인근 도시 세이발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티칼의 비문에서만 발견될 뿐, 다른 도시에는 그 어떠한 관련 기록들이 없는 것을 통해 한때 마야 지방의 맹주였던 티칼이 얼마나 쇠락하였는지에 대하여 단적으로 보여준다.

티칼의 안전이 위협받으면서 사람들이 점차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심 지역으로 몰리자, 인근 숲은 황폐화되었고 역병, 침식, 식량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같은 재앙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티칼은 830년과 950년 사이에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사라졌으며 중앙정부의 권위는 급격히 추락했다. 게다가 인근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살기 위해서 티칼과 같은 대도시들로 유민들이 이주해오자 식량 부족과 환경 파괴는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다만 유민들의 유입량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메울 만큼 충분하지 못했기에, 티칼의 총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나갔다.

9세기 후반 경, 거의 무너져가는 왕권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869년에 자소우 찬 카이이 2세가 중앙 광장에 비석들을 세우고 업적을 과시하려 하는 등 몇 차례 권위를 세우려 시도하였으나, 이미 망해가는 티칼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때 세워진 비석들이 티칼에 세워진 마지막 구조물이었다. 당대 티칼은 이미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수준의 폐허였으며, 왕들도 옛 영광만 추억하며 정글로 둘러싸인 왕궁 폐허 일부에서 간신히 칭호만 유지해나가는 수준이었다. 티칼의 위성 도시였던 우아삭툰, 짐발과 같은 도시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9세기 말에는 티칼의 거의 모든 인구가 사라졌다. 옛 왕궁에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으며, 중앙 광장에는 짚으로 만든 조잡한 가옥들이 세워지는 등 한때 거대했던 제국의 면모는 이미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신전들도 집으로 개조하여 사용했으며, 몇몇 문들을 막거나 입구를 새로 내어 용도를 바꾸었다. 고고학자들이 신전에서 발견한 가정용 토기들과 평민들이 쓰던 악기들도 이러한 연유로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신전들은 도굴당하거나 파괴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분해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까지 했다. 옛 왕들과 신들에 대한 경의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북부 아크로폴리스에 봉인되어있던 왕들의 무덤은 옥이나 황금같은 부장품들을 노리는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었다. 이 때 찾기 쉬운 거대한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었고, 현재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것들은 정말 깊은 곳에 있어 도굴꾼들이 건드리지 못했거나 업적이 별로 없어 규모가 작은 무덤들이다. 950년 경, 티칼은 완전히 폐허 도시로 전락했고, 다만 몇몇 마을 주민들이 석조 폐허 속에서 나무로 가옥을 짓고 살아갔다. 10세기, 11세기가 지나자 이 주민들조차 도시를 떠났고, 이후 고고학자들이 다시 재발견하기 전까지 약 몇 천년간 티칼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티칼의 멸망은 인구과잉과 농업 실패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티칼은 수 천년 동안 마야 문명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였기에 티칼의 쇠락은 고전기 마야 문명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다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티칼이 단순히 인구과잉과 농업 실패 뿐만 아니라, 9세기에 티칼을 덮친 기록적인 가뭄 때문에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근현대

1525년,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티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을 통과했으나, 그의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 안드레스 데 아반다노 수사가 1696년에 밀림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중 발견한 거대한 석조 폐허들에 대한 언급이 남아있는데, 지리 정보를 종합하면 이 폐허가 바로 티칼일 가능성이 크다.

티칼은 워낙 거대한 크기와 너무나 화려했던 과거 탓에 원주민들에게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다. 원주민들은 티칼의 폐허를 성소로 여겼으며 1850년대에 과테말라의 탐험대를 티칼의 폐허로 이끌기도 했다. 17세기 경부터는 점차 티칼에 대한 언급이 유럽인들의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19세기에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드릭 캐서우드가 집필한 삽화책에서 티칼을 묘사하는 듯한 언급이 있으나, 이들은 티칼을 실제로 방문한 적은 없다. 티칼은 워낙 외진 정글 속에 묻혀 있었기에 1848년에 페텐 주의 주지사이자 관리였던 모데스토 멘데즈가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다. 화가인 유세비오 라라가 그들과 동행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1853년에 독일에서 책을 출판했다. 이후 알프레드 P. 모슬레이를 포함한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기록을 남기거나 사진을 찍었고, 20세기 초가 되자 고고학자들은 이 곳의 나무들을 제거하고 본격적인 기록 작업에 들어갔다.

1956년에 티칼 지역을 지도로 작성하려는 '티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1956년부터 1970년까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감독 하에 주요한 신전들이 발굴되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건축물들을 지도에 남겼으며, 상당수의 구조물들의 복원에 성공했다. 에드윈 M. 슈크와 윌리엄 코가 감독한 작업에 의하여 북부 아크로폴리스와 중앙 광장이 1957년에서 1969년까지 발굴되었다. 티칼 프로젝트로 인하여 200여 개의 신전들이 지도에 남겨졌고 1979년에 과테말라 정부는 티칼의 추가적인 발굴조사사업을 실시하여 1984년에 끝냈다.

티칼은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를 촬영할 적에 외계 행성 야빈 4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티칼은 현재 과테말라의 주요 관광지들 중 하나이며, 티칼 국립공원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다. 티칼 부지에는 1964년에 박물관이 들어서 티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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