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축성하였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다.

 
숭례문 (1900년경)
 
숭례문 (1904년)
 
숭례문 (1935년)
1396년(태조 5년) : 최유경의 지휘로 준공[1][2][3]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주 1] 1398년(태조7년) : 숭례문 완성.[2] 1433년 7월 :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돋운 뒤 새로 짓기로 정함.[4] 1447년 8월경 : 숭례문 신축 착공.[5] 1448년 3월 17일 : 숭례문 신축 완공.[2][6] 1478년(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짐. 그 시기의 적절성으로 수리를 미룸.[7][8] 1479년 4월 2일 : 숭례문 중수 완공.[2][6] 1907년 :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9]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10] 1908년 9월 :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이 훼철됨.[11]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12]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13]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14]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5]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16][17]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12월 20일 :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재지정.[18]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19]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20]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21][22][23]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24]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2][25][26]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 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27]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28][29]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30][31] 2013년 5월 1일 : 숭례문 관리단체를 종전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32][33] 2013년 5월 4일 : 숭례문 공식 개방[34][35]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1396축성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 가 나 다 라 마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cha.go.kr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396년 상량문, “洪武二十玖年丙子十月初六日 判事嘉靖大夫中樞院使崔有慶 正 憲大夫全羅道觀察黜陟使李茂 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完山府尹孫 興宗 副判事前嘉善大夫開城府尹李之浩 前嘉善大夫戶曹典書石崇 使 前中直大夫司僕卿尹乙休 副使前司僕少卿景廉 判官前中郞將張仁哲 前中直大夫司僕卿朴理 前書雲副正張璡 前中郞將權乙奇 司損司直兪 英俊 前中郞將金建 前中郞將鄭壽山 前中郞將崔興國 前中郞將任富 前中郞將金渚 前中郞將金允甫 前中郞將庚鼇山 常務錄事 都評議錄 事前別將孫興夏 都評議錄事前別將張籍 別監役 前南部令朴貴生 石 手 某主 ○○ 鄭化 ○○…○賢布 富議 ○同…○天湜 金豆彦 王 持…○○ 軍人 全羅道完山府 任領內 合陸仟捌伯拾柒名” 『韓國古建築上樑記文集』(考古美術同人會, 1964) 7~8쪽 《세종실록》 61권 15년 7월 21일. 2번째 기사. 황희·맹사성·권진 등을 불러 강녕전·경회루·역상 등에 관해 논의하다, 〈위키문헌〉 《세종실록》 117권 29년 8월 30일, 좌참찬 정분 등에게 숭례문의 신축을 감독하게 하다 ,〈위키문헌〉 ↑ 가 나 김도형 (2010). 《순성의 즐거움》. 36쪽: 효형출판. ISBN 9788958720966.  《성종실록》 90권 9년 3월 20일, 2번째 기사. 박숙진이 백성들의 사역에 대한 시기 적절성을 아뢰니 이를 수락하다 《성종실록》 94권 9년 7월 19일, 숭례문은 일손이 부족하니 수리를 미루라고 명하다 배연국 기자 (2001년 8월 6일). “[8·15 56돌]왜색 여전한 숭례문”. 세계일보.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최종호 (2008년 3월 3일). “문화재 재난예방과 박물관 재난대비”. 박물관뉴스. [깨진 링크] 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25, ISBN 978-89-5872-096-6 조선총독부 관보 Archived 2016년 3월 31일 - 웨이백 머신 제1175호. 1916년 7월 4일자. p.33(三三) 조선총독부 부령제52호. 고적급유물보존규칙(古蹟及遺物保存規則). 2016년 3월 19일 확인. 조선총독부 관보 Archived 2016년 3월 31일 - 웨이백 머신 제1175호. 1916년 7월 4일자. p.34(三四) 조선총독부 훈령제29호. 고적조사위원회규정(古蹟調査委員會規程). 2016년 3월 19일 확인. 이순우 시민기자 (2005년 11월 10일). “남대문 '일제 잔재' 주장 근거 없다”. 오마이뉴스.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조선총독부관보 Archived 2016년 3월 14일 - 웨이백 머신 제1975호 호외. 1934년 8월 9일자. 제령 제6호. 2016년 3월 14일 확인. 조선총독부관보 Archived 2016년 3월 8일 - 웨이백 머신 제2290호, 조선총독부고시 제430호. 남준기 기자 (2005년 11월 8일). ““남대문 ‘국보1호’ 지정은 역사적 수치””. 내일신문.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관보 호외 1962년 12월 29일자. pp.1329-1331(一三二九 ~ 一三三一) 문교부고시제169호. 《문화재보호법에의한국보지정》 이용 기자 (1994년 11월 15일). “「서울의 상징」 남대문이 1위/「가나아트」지 설문”. 경향신문.  송종복 기고 (2015년 12월 9일). “崇禮門(숭례문)”. 경남매일.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정성호 기자 (2005년 5월 27일). “숭례문 98년 만에 개방..숭례문 광장 개장”. 연합뉴스.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정성호 기자 (2005년 5월 27일). “시민곁으로 돌아온 국보 1호 '숭례문'”. 연합뉴스.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숭례문광장' 오늘 일반인에게 개방”. SBS TV. 2005년 5월 27일.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김대진 기자 (2006년 3월 3일). “빗장 푼 숭례문…100년 만에 ‘활짝’”. 경향신문.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이세원 기자 (2008년 2월 10일). “`국보 1호' 숭례문 불..방화 용의자 목격(종합)”. 연합뉴스.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서울=연합뉴스) 사건팀 (2008년 2월 10일). “`국보 1호' 숭례문 불..방화 용의자 목격(종합)”. 연합뉴스.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이기환 기자 (2009년 2월 3일). “‘국보1호 원형’ 훼손 부재 재활용에 달렸다”. 경향신문.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김윤구 기자 (2010년 2월 10일). “<국민 뜻모아 되살아나는 숭례문> (종합)”. 연합뉴스.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이광표 기자 (2010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2년… 오늘 복원 시작”. 동아일보.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도재기 기자 (2013년 4월 29일). “숭례문 복구 완료 내달 4일 일반 공개… 고궁 무료개방도”. 경향신문.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박동주 기자 (2013년 4월 29일). “돌아온 숭례문”. 연합뉴스.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문화재청고시 제2013-38호, 2013년 4월 16일. 김태식 기자 (2012년 10월 17일). “문화재청이 숭례문 직접 관리하기로”. 연합뉴스. 2016년 3월 21일에 확인함.  김태식 기자 (2013년 5월 4일). “숭례문, 5년3개월만에 복구 준공(종합)”. 연합뉴스.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홍도은 기자 (2013년 5월 4일). “숭례문 오늘 오후 2시 복구 기념식…시민 품으로”. 경향신문. 2016년 3월 2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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