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Paul's Cathedral

( 세인트폴 대성당 )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은 시티 오브 런던의 러드게이트 힐에 있는 높이 111m의 성공회 성당으로, 런던 주교좌가 자리 잡고 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사도 바울로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기원후 604년에 이 곳에 지어져 있던 성당을 그 원형으로 하여 세워졌다. 원래 있었던 세인트폴 대성당은 1666년 런던 대화재 때 불타 버렸으며, 1675년에 크리스토퍼 렌 경의 감독 하에 영국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35년 만에 완공됐다. 불타기 전 옛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 시가지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들 중 하나로, 특히 멀리서도 잘 보이는 대성당의 돔은 약 3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런던의 스카이라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성당은 111m에 달하는 높이로 1710년부터 1967년까지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였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리버풀 대성당 다음가는 크기를 자랑하며, 영국에서 2번째로 거대한 교회 건물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국가적인 행사들에는 허레이쇼 넬슨 경의 장례식, 웰링턴 공작의 장례식,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 등이 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2차 세계 대전의 런던 공습 도중 연기에 휩싸인 사진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또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축하하는 행사가 이 곳에서 열렸으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이 이 곳에서 열렸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25주년, 50주년,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 모두가 바로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렸다. 대성당은 여전히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매일 집회와 미사가 열린다. 관광객 입장료는 2019년 1월 기준으로 성인 20파운드이나, 순례객의 경우에는 출입료를 받지 않는다.

노르만 족 이전

성 베다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604년에 멜리투스라는 이름의 수도사를 당시 앵글로색슨 족의 첫 주교로[1] 임명하였다 이후 색슨 족의 왕은 런던에 멜리투스를 위한 새 주교좌 성당을 지었는데, 이 성당을 세인트 폴에게 헌사하였다. 역사학자들은, 확실하게 검증되지는 않았으나 이 성당이 런던과 앵글로색슨 족에 의하여 세워진 첫 기독교 성당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616년에 앵글로색슨 족의 첫 기독교 왕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멜리투스 주교의 간섭에 심한 반감을 느끼고 그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멜리투스 주교를 쫓아내었고, 다시 원시 신앙으로 돌아갔다. 이후 성당은 무너져 내렸고, 이후 7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기독교가 색슨 족들에게 전파되었을 적, 다시 새로운 성당이 런던에 세워지게 되었다. 다만 이 건물은 962년에 불타 전소하였고, 같은 해에 곧바로 복구되었다.[2] 이후 1016년에 한 색슨 족 왕이 이 성당에 묻히고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이후 이 무덤도 불에 타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옛 세인트 폴 대성당
옛 세인트 폴 대성당

4번째로 재건된 성당을 고고학자들은 '옛 세인트 폴 대성당'이라고 칭하며, 현 대성당의 직접적인 원형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 옛 성당은 1087년에 노르만족에 의하여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나, 다만 113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일부가 전소되어 다시 건설하였다. 다만 이 성당은 1240년까지 축성되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본디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던 성당이 고딕 양식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하여 더 뾰족한 창문들과 상부의 거대한 창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또한 고딕 양식의 석조 지탱 아치들이 옆에 빽빽하게 붙어섰고, 중앙에 거대한 첨탑을 세워 마무리하였다고 전해진다.

1256년에 개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314년에 공사가 완공되었고, 1878년에 실시된 조사 작업에 의하면 당시 성당의 길이는 178m, 너비는 30m였으며, 첨탑은 약 149m였다고 전해진다. 16세기가 되자 건물은 점차 퇴락해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시절 당시 진행된 영국화 정책으로 인하여,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성당 내부에 있던 성물들, 가구들, 수도원들 일부가 병사들에 의하여 무너지거나 약탈당하기도 하였다.[3] 성당 내부에 있던 몇몇 유물들과 성화들은 왕의 개인 창고로 보관되어 살아남기도 하였으나, 성당 담에 쓰인 석재들이 민간에게 팔려나가는 등 여전히 대성당은 수모를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61년에는 큰 벼락을 맞아 중앙의 첨탑이 파괴되었는데, 로마 가톨릭 수도승들은 이를 보고 '가톨릭을 배반한 것에 대한 신의 보복'이라고 저주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교회 주교였던 제임스 필킹턴은 오히려 이를 '성당을 파괴한 것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보고, 즉시 모든 성당 파괴 행위들을 중지하였으며 복구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후 런던 시민들과 왕실이 기부를 통하여 재원을 대었으나,[4] 당시 빈약하던 영국의 재무 상황으로는 도저히 성당을 옛 모습처럼 웅장하게 만들 수 없던 형편이었던지라 약간 엉성하게 복원되었다. 1630년대에 영국의 첫 고전주의 건축가라고 불리는 이니고 존스에 의하여 서쪽 프론트가 신설되었다. 이후 영국의 왕당파와 의회파가 내전을 벌이는 동안, 이 곳에서 상당한 혼란들이 일어났고 결국 보관되어 있던 고문서들이 전부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옛 세인트 폴 대성당은 한동안 영국 국교회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1666년 일어난 런던 대화재로 크게 불타는 참사를 입었다. 당시 정부는 대성당을 원형 그대로 복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현대적인 양식으로 대성당을 복구하기로 결정하였다.[5]

현 세인트 폴 대성당

1669년 7월 30일, 새 성당의 설계 작업이 크리스토퍼 렌 경에게 맡겨졌다. 그는 당시 대화재로 인하여 크게 피해를 입은 런던의 성당들을 복구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런던 시내의 교회들 약 50여개가 모두 렌 경의 설계안대로 복구된 것들이다. 렌 경은 1661년, 옛 대성당이 불타기 전부터 이미 대성당의 수리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으며, 당시 고전주의적인 양식을 성당에 첨가하고 내관과 외관을 조금 더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하였다. 렌 경은 고딕 느낌의 높은 첨탑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거대한 돔을 대신 짓고 싶어하였으며, 남아있는 부분들을 가림막으로 사용하여 외관에 혁신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는 옛 성당이 불탄 이후 높은 크기의 돔과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익랑과 신랑을 지닌 설계도를 그려 왕실에 제출하였다. 화재 직후에는 불탄 옛 성당의 자재들 대부분을 무너뜨리지 않고 공사에 그대로 활용하려 하였으나, 찰스 2세가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하여 더더욱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싶어하며 결과적으로 1670년대 초반에 모든 옛 성당의 골조들을 철거하고 아예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합의하였다.

1668년 7월, 윌리엄 산크로프는 렌 경에게 서한을 보내 캔터베리 대주교, 런던과 옥스퍼드의 주교들이 한마음으로 새롭게 설계될 대성당이 '도시와 국가의 위대한 명성에 걸맞은 아름답고 완벽한 성당'이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을 전했다. 이후 렌 경은 심혈을 기울여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작성했고, 이 작업은 몇 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 이 설계안은 왕실의 허락을 받아 통과한다. 다만 렌 경의 의도에 따라 만약 필요한 변화가 있을 경우 렌 경의 뜻대로 바꾸는 것도 허락해주었다. 이후 이 설계안대로 지어진 성당이 바로 지금의 세인트 폴 대성당이 되었으며, 이는 현재에도 영국에서 2번째로 거대한 대성당이고, 특히 그 돔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돔들 중 하나로 꼽힌다. 참고로 대성당의 건축 재원은 대부분 석탄세로 충당했으며, 특히 렌 경이 91세로 장수하며 평생 동안 대성당의 건축에 참여했기에 렌 경의 의도 그대로 완성될 수 있기도 하였다.

1708년 10월 26일, 세인트 폴 대성당의 마지막 돌이 맨 꼭대기에 올라가며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이 완공식에는 크리스토퍼 렌 경의 아들과 석공들의 자제들이 참여하였으며, 1711년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에 의회에 의하여 대성당 완공이 공식 발표되었다. 사실 대성당은 1720년대가 되어서야 지붕에 추가적인 석상들이 올라가는 등 1711년에는 완벽하게 마무리된 상황이 아니었기는 하였다. 대성당 신축 공사에 사용된 예산은 2019년 기준으로 약 1억 6천 5백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한다.

축성

1697년 12월 2일, 런던 대화재가 일어나고 31년 3개월 후에 새로운 세인트 폴 대성당이 축성되었다.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헨리 콤프턴이 미사를 집전했으며, 시편 122절의 구절을 인용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우리 함께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하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한없이 기뻤도다.

— 시편 122편 1절

첫 집회는 바로 그 주의 일요일 날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렌의 새 대성당에 대한 런던 시민은 양 쪽으로 갈렸다. 한 편은 렌의 새 대성당을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꾸미는 경이로운 건축물이라고 주장했고, 한 편은 웅장하고 거대한 런던 속에 갑작스레 출현한 비영국적인 건축물이라고 혹평했다.

1900년대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세인트 폴 대성당
전쟁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세인트 폴 대성당은 독일 공군의 런던 대공습을 무사히 넘겼다. 다만 1940년 10월 10일, 그리고 1941년 4월17일에 한 번씩 폭탄을 맞아 피해를 입었다. 1940년의 폭탄은 성당의 제단 일부를 무너뜨렸으며, 1941년의 폭탄은 익랑 벽을 뚫고 들어와 대성당 크립트에 구멍을 내며 폭발했다. 후대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2번째 폭격으로 인하여 돔의 골조 자체가 흔들렸으며, 자칫했으면 돔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1940년 9월 12일, 불발탄이 성당 위로 떨어졌고, 성공적으로 해체되었다. 만일 이 폭탄이 예정대로 터졌다면, 건물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고 지름 30m 크기의 크레이터를 지반에 남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이 해체 작업의 공훈을 인정받은 폭탄 해체반은 성 조지 훈장을 수여받았다. 현재 이 훈장은 런던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공습 기간 중 런던의 모습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진은 허버트 메이슨이 1940년 12월 29일 찍은 세인트 폴 대성당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검은 연기에 휩싸인 대성당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후에 런던 대학의 역사학자 리스 자딘은 이렇게 기록했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휩싸인 채, 혼돈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창백한 대성당의 돔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있었다. 공습 도중, 윈스턴 처칠 수상은 소방서에 연락하여 모든 가용한 소방 자원들을 대성당 인근에 집중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대성당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말했으며, 만일 대성당이 무너진다면 이 나라의 국체 또한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이후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이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치러졌다.

복구 작업

1996년 존 B. 챔버스 교수가 이끄는 복구 팀이 구리, 납 지붕을 교체하고 새롭게 단장하였다. 이 작업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을 소요하며 2011년 6월에 끝났으며, 당시 영국에서 이루어진 가장 거대한 규모의 복구 작업들 중 하나였다.

《Bede 1969》. 142 - 143쪽.  《Garmonsway》. 1953.  Stanford E. Lehmberg (1988). 《The Reformation of Cathedrals》. Princeton UP. 114쪽.  Dugdale. 《History of St Paul's Cathedral》. 134쪽.  《Campbell》.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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