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aremaa

( 사레마섬 )

사레마섬(에스토니아어: Saaremaa, 독일어: Ösel; 스웨덴어: Ösel)은 발트해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섬이다. 면적은 2,673km2, 인구는 31,435명(2020년 1월 기준), 인구 밀도는 13.3명/km2이며 에스토니아에서 면적이 가장 큰 섬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사레주에 속하며 북쪽에는 히우마섬이 있다. 가장 큰 도시는 쿠레사레이다.

고대와 중세  발리알라 요새 유적

사레마섬의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이 섬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기원전 5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1] 서르베반도에서는 철기 시대에 해당되던 서기 700년에서 750년경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장례식용 배가 발굴되기도 했다.

바이킹의 사가에서는 사레마섬 원주민들과 바이킹 간에 수차례 충돌이 있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레마섬은 해적 소굴로 악명높았으며 동부 바이킹이 침공해 들어오기도 했다. 리보니아의 헨리가 남긴 연대기에 따르면, 사레마섬 원주민인 500명의 외셀인들과 16척의 배가 오늘날의 스웨덴 남부 지역을 침략했으며, 나중에는 덴마크에 속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서기 1000년경에는 아이슬란드의 군나르 하문다르손이 바이킹을 이끌고 외시슬라섬 (사레마섬)을 공격했다고 전한다. 하문다르손은 이 섬에서 할그리무르 (Hallgrímur)란 전사로부터 마성의 창 한 자루를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냘의 사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윽고 그들은 남쪽으로 덴마크까지, 다시 동쪽으로 스말뢴드까지 진격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뒀다. 그들은 가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그들은 라팔라 →오늘날의 탈린으로 진격하여 그곳에서 해적떼를 만나, 한번에 싸워 이겼다. 그후 동쪽으로 외시슬라 →사레마에 이르러 잠시 곶 아래에 머물렀다. 거기서 그들은 곶 위에서 내려오는 한 남자를 보았고, 군나르는 뭍으로 가서 그를 만나 말을 걸었다. 군나르가 이름을 묻자 남자는 토피 (Tófi)라 하였고, 군나르는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 다시 물었다.

남자가 이르기를, "그대를 보러 왔나이다. 곶 반대편 아래쪽에 전함 두 척이 있는데 그 지휘관을 그대에게 알려드리다. 두 형제가 선장으로 하나는 이름이 할그리무르 (Hallgrímur)요 다른 하나는 콜스케구르 (Kolskeggur)이라. 내 알기로 그들은 강력한 용사요, 또 내 알기로 세상에 둘도 없을 훌륭한 무기를 지니고 있더이다. 할리그리무르는 끓어오르는 마법으로 만든 창을 지녔는데, 주문에 이르기를 어떤 무기라도 창 덕에 저승으로 몰아넣을 수 없을 것이라. 더욱이 그 창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창 속에서 큰 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와 저 멀리까지 들린다고 전하니, 그런 강력한 본성을 창이 지니고 있더이다."

중세시대 덴마크의 역사학자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남긴 사서 《데인인의 사적》 제15권에서는 1170년 욀란드섬에서 연속으로 벌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덴마크의 국왕 발데마르 1세는 자신의 함대를 전부 동원해 쿠로니아 (쿠를란트)와 사레마의 해적들을 소탕했다고 한다.

사레마섬 원주민이 벌인 침략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례로 1187년 스웨덴의 시그투나 마을을 약탈한 사건이 있는데, 마을을 불사르고 스웨덴 대주교 요하네스를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약탈자들이 사레마 주민이 아닌 카렐리아인과 쿠로니아인이라는 설도 있으며,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는 발굴조사 결과로도 입증되지 못했다. 약탈 후에도 한동안 시그투나 마을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다가 13세기 들어 후빙기 반동으로 인한 항해의 어려움으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2]

1227년, 리보니아 십자군 시기 리보니아 기사단이 사레마섬을 정복하고 외젤비크 주교령을 설치하였으나, 정복 후에도 섬 주민들의 거센 저항이 계속되었다. 1236년 사울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이 리보니아 기사단을 무찌르자 사레마섬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리보니아 기사단장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기사단은 튜턴 기사단에 흡수되었다. 기사단의 사레마섬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때마침 전래된 기독교도 널리 전파되었고, 카르마, 카리아, 키헬코나, 무후, 푀이데, 퓌하, 발리알라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한편 이 시기 튜턴 기사단이 쿠레사레성을 지어 외젤비크 주교에게 바쳤다. 1380년에 지어지기 시작한 이 요새는 오늘날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요새로, 중세 후기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레마섬 대부분은 외젤비크 주교령의 직접통치를 받고 있었으나, 일부 영토는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하사되었다. 1559년 외젤비크 주교령이 덴마크에 할양되면서 사레마섬은 덴마크령 에스토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1570년부터 1645년까지 사레마섬은 덴마크 왕국의 소유지가 되었다. 섬 주민들은 일찍이 14세기부터 발트해를 건너 인근의 리보니아 연안을 따라 정착해 마을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근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에 따라 사레마섬은 덴마크 왕국에서 스웨덴의 소유지로 넘어갔으며, 이름도 스웨덴어식을 따라 '외셀' (Ösel)이라 불리게 되었다. 1721년에는 니스타드 조약으로 리보니아 공국 전역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갔으며, 리보니아현에 속하게 되었다. 1840년에는 아렌스부르크 (지금의 쿠레사레)에 스파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러시아인들와 발트 지역 독일인들의 휴양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레마섬의 스파는 나머지 에스토니아 지역에 문을 연 스파보다 그 수가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독일제국군은 에스토니아 연안 섬을 침공했고 1918년 11월 종전 시까지 점령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후 사레마섬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새로 독립한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1939년 8월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섬내 대다수 주민이었던 발트 독일인들이 독일로 이주하였다. 1940년 6월 소련군이 에스토니아 전역을 점령하면서 사레마섬에 처음으로 진주하였고, 1940년 소련에 정식 편입되었다. 1941년 베오울프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며 함께 침공당했다. 이후 1944년 10월~11월 경 독일군의 패퇴로 소련군이 다시 진주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 소련 군당국은 사레마섬을 제한구역으로 설정, 현지인 외 에스토니아인과 외국인의 출입을 금했다. 당시 아스테 마을에 '아스테 항공기지'를 건설해 소련 공군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접근제한구역이 해제되었고, 1991년 8월에는 에스토니아가 소련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Saaremaa esimesed asukad | Histrodamus.ee”. 《www.eestiajalugu.ee》.  Enn Tarvel (2007). [1] Archived 2017년 10월 11일 - 웨이백 머신 Sigtuna hukkumine. Haridus, 2007 (7-8), p 38–41
Photographies by:
Abrget47j - CC BY-SA 3.0 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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