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ölner Dom

( 쾰른 대성당 )

쾰른 대성당(독일어: Kölner Dom, 정식 명칭: Hohe Domkirche St. Peter)은 독일 쾰른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쾰른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라 쾰른 주교좌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쾰른 대교구의 교구장은 라이너 마리아 뵐키 추기경이다. 이 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로, 성 바실리 대성당에 이어,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일컬어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라고 묘사하였다. 매일 2만여 명의 관광객이 이 성당을 찾는다.

쾰른 대성당은 높이 157.38미터로, 울름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로마네스크·고딕 양식 성당이다.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가져온 동방 박사 3인의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한 건축물로서 124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지만, 오랜 건축 기간을 거쳐 결국 1880년에 네오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완공 이후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라인강변 언덕 위에 지어졌으며, 대성당 주변에는 쾰른 중앙역과 호엔촐레른 철교, 루트비히 박물관, 로마 게르만 박물관 등이 있다.

로마 시대

현재의 쾰른 대성당은 1248년부터 지어진 건축물로서, 이전 시대에도 같은 자리에 다른 건축물들이 존재했었다. 쾰른이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1~4세기 사이에 지어진 로마식 주택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내진 밑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에 따라 최소한 4세기 이후부터 당시 쾰른의 첫 교구장 주교였던 마테르누스의 지시로 지어진 정사각형의 '최초 성당'을 포함한 기독교와 관련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2] 현 성당의 동쪽 끝 부분에는 세례반이 있었으며, 9세기에 구 성당을 지으면서 파괴되었다. 현재는 팔각형의 세례용 우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3]

구 성당
구성당 

'구성당' 혹은 '힐데볼트 성당'은 현재 모습의 성당이 지어지기 바로 이전 성당으로, 건축을 시작한 힐데볼트 대주교가 이미 사망한 873년 12월 27일에 축성되었다.[4] 그는 건축주와 성당 설립 기금 헌납 자로서 메로빙거 왕조시대에 마지막으로 구성당을 개축한 최고의 적임자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구성당의 실질적 기반을 닦았다.[5]

구성당은 직사각형의 주랑을 가진 건물로 지어졌는데, 이 건물은 당시 유럽에 생긴 여러 교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6] 10세기부터 서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십자가 유물인 게로 십자가의 보관소로 운영되었다.[5] 1248년 구 성당은 새 고딕 양식의 성당을 짓기 위한 목적으로 보수가 되지 않고 노후화되어갔다. 결국, 1248년 4월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전소하여 파괴되었다.[7] 화재 이후 구성당의 서쪽 부분을 재건하여 쾰른 대성당이 착공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미사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1차 건설기
 
1824년 미완성의 성당, 막스 하삭, Der Dom zu Köln, 1911.

1165년 7월 23일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드 폰 다셀은 밀라노로부터 동방 박사 유골함을 쾰른으로 옮겨왔다.[8] 동방 박사 유골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봉헌 물로, 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그의 후계자인 대주교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 때 금세공이 들어간 새로운 유골함을 제작하여 1225년에 완성되었다.[1] 동방 박사 유골함으로 유럽 전 지역으로부터 순례객을 끌어모았으며 1248년 8월 15일에 대주교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에 의해 대성당이자 순례성당으로서의 명성에 적합한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되었다.[1][9] 당시 공사 총 책임자로 게르하르트 폰 릴레가 임명되어 당시 흔하던 독일의 로마네스크 식 건축양식이 아닌 북프랑스의 아미엥 대성당을 바탕으로 한 신식 고딕 양식으로 새 대성당이 설계되었다.[10][11][12] 쾰른이 있는 라인란트 지역은 단단한 암반이 없었기에 라인 강을 따라 본 이남에 있는 드라헨펠스에서 조면암을 채굴하여 건축재료로 사용하였다.[13]

1265년 제실과 제실의 아치형 천장이 완공되었다.[14] 1277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성구 실의 제단을 축성하였다.[15] 1288년 쾰른이 신성로마제국의 제국 자유 도시로 격상된 이후 성당 또한 명목상 대성당으로 함께 격상되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성당 건설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성당의 내진 내부

1304년부터 1322년까지 48명의 왕이 그려진 17.15 미터 높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창문에 설치되었다.[16] 48명의 왕은 수염이 있는 왕과 없는 왕들이 교대되어 그려졌는데, 수염이 없는 젊은 왕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24명의 유대 왕들을 의미하며 수염이 있는 왕들은 묵시록에 등장하는 24명의 장로를 의미한다. 이 형상들의 높이는 약 2.25미터이다. 마리아와 어린 예수를 찬양하는 자세의 동방 박사가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되었다.[16] 내진과 후진에 설치된 총 스테인드글라스의 넓이는 1,350m²에 달하며 이는 중세시대에 그려진 가장 큰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테인드글라스의 세밀함은 사라져갔으나 처음 채색된 색상만은 지속하였다. 마찬가지로 1310년과 1320년에 공사 총 책임자였던 요하네스가 구성당 석재의 4.5미터 높이 위로 건물을 짓는 전면부 설계를 그렸다. 약 1300년에 남쪽 탑이 착공되었다.[17] 1994년 4월 14일 남쪽 탑의 4미터 아래에서 연대가 표시된 동전이 발견됨에 따라 탑이 1360년경에 착공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내진과 후진의 축성식이 1322년 9월 27일에 성공적으로 치러졌다.[18] 그와 동시에 동방 박사의 유골함 또한 안치되었다. 구성당에 매장되었던 대주교 게로와 라인날트 폰 다셀,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 엥엘베르트 1세,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의 묘를 새로 건설된 제실 안으로 이장하였다.[16]

1331년 신랑의 토대가 설치되었고 2년 후인 1333년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공사 현장을 방문하였다. 1375년 현관에 사용할 석상이 제작되었다. 1395년부터 안드레아스 폰 에베르딩겐이 새 공사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1410년 남쪽 탑이 2층까지 증축되었으며 "동방 박사의 종" 또는 "피의 종"이라 불리는 성당 최초의 종이 설치되었다.[19] 후임 총 책임자로서, 니콜라우스 판 부에렌은 1437년 당시 약 59미터 높이의 남쪽 탑에 종을 걸 수 있었다.[20] 1448년과 1449년 11,500kg에 달하는 프레티오사 종과 5,200kg의 스페시오사 종이 남쪽 탑 57미터 높이에 추가로 설치되었다. 그 이후로 남쪽 탑의 공사는 다시 진행되었다.[21]

15세기 말 무렵에 들어, 건설 속도는 차츰 무뎌져 갔다. 1차 건설기의 마지막 공사 총 책임자는 1469년부터 1491년까지 부임한 요한 판 프랑켄베르크였다. 1500년경에 북쪽 탑의 기초 석이 설치되었고, 1510년부터 성당 건설 공사는 중단되기를 반복하다 결국 1528년에 마지막 공사가 거행되었다. 1530년 이후에도 아직 대성당 건설 비용이 남아 있었기에 몇몇 젊은 학자들이 건설을 재개하기 위하여 고용되었다. 결국, 면죄부와 성물 판매의 감소와 과도한 인력 고용으로 재정난에 부딪혀 공사가 완전히 중단되었다.[22]

1531년 1월 5일 황제 카를 5세의 형제인 페르디난트 1세는 쾰른 대성당에서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1744년부터 1770년까지 성당의 사용되던 공간은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증축되었다. 프랑스가 쾰른을 점령한 1794년부터 성당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796년 11월 프랑스 점령군은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기 위하여 건설 재료 등을 모두 정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1804년 1월 4일, 1794년 프랑스 점령군이 베스트팔렌으로 가져갔던 동방 박사 유골함이 쾰른으로 귀환하였다. 1814년 11월 20일에는 요셉 괴레스가 신문 "Rheinischen Merkur"를 통해 성당의 완공을 촉구하였다.

300년이 넘도록 미완성 상태로 남은 거대한 성당은 도시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1868년까지 남쪽 탑 꼭대기에는 14세기에 만들어졌던 공사용 거중기가 방치되어 있었다.[23][24] 성당이 완성되고 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믿음이 생길 정도로 당시에는 쾰른 시민들에게 미완성 상태의 성당이 도시의 한 모습으로 여겨졌다고 전해진다.

2차 건설기
 
설계 도면

1814년, 다름슈타트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게오르그 몰러의 반쪽 대성당 설계도면이 발견되어 공사가 재개되었다.[25] 이 설계는 게하르트의 후임자였던 아르놀드가 작성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반쪽 설계도는 1816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 들어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인기가 없어졌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 계획되었던 설계도는 독일의 통일로 인하여 당시 강하게 불었던 민족주의적 의미를 함축하는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재설계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1842년 9월 4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대주교 요하네스 폰 가이셀에 의해 쾰른 대성당의 건축을 재개하는 주춧돌이 다시 세워졌다.[26] 주춧돌은 완공되지 못했던 남쪽 탑 가장 위에 놓였으며 기공식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주춧돌이 놓인 이 곳에서, 이 탑들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들이 우뚝 솟을 것이다.”[27]라고 연설하였다. 또한, 프로이센 왕가는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여, 기공식과 함께 왕실의 중요한 의뢰 및 건설 비용 회계를 담당할 '쾰른 중앙 성당 건설 연맹'이 결성되었다.[28] 한편, 1820년 10월 19일에는 성당에 도둑이 들어 동방 박사 유골함의 값 비싼 부분을 때어내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823년 성당 건설 조합은 재설립되어 첫 번째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29] 재개된 공사의 첫 번째 공사 총 책임자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츠비르너가 임명되었다.[30] 그는 성당의 완공을 위하여 1855년 성당 남쪽 면의 설계를 완성하였다. 1848년 일시적인 목재 천장이 신랑과 익랑에 설치되었다. 1863년에는 내부 공사가 모두 완료됨에 따라 내진과 신랑 사이에 세워져 있던 분리 벽이 560년 만에 해체되었다.[31] 1863년부터 서쪽 전면부 공사가 재개되었다. 북쪽 탑을 공사할 때에는 프로이센 왕가의 지원금만으로는 건설비가 충당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당 복권을 판매하여 부족한 예산을 채웠다.[32]

드디어 1880년, 대성당은 1280년 중세시대에 착공된 지 600년 만에 완공되었다. 익랑의 현관 전면부는 중세시대 설계가 없었기에 19세기 작품이 되었다. 건설 기간에 2명의 공사 총 책임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츠비르너와 카를 에두아르드 리하르트 포이히텔을 통하여 지붕과 탑을 건설하는 데에 근대적인 기술이 도입되었다. 건축에 소비된 암석들은 총 삼십만여 톤에 달하였다. 완공된 직후 157.38미터의 쾰른 대성당은 4년 후 169.3미터의 워싱턴 기념비가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기록되었다.

성당이 완공된 1880년 10월 15일에는 빌헬름 1세가 공식 대표로 독일 제국 건국을 위한 통일 독일의 정체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참석하여 완공 축제가 거행되었다. 당시에는 성당 꼭대기가 아직 완료되지 못했으나 당시 제작된 수많은 엽서의 사진은 이를 완공된 것처럼 수정하여 발행하였다. 하루가 지난 1880년 10월 16일 역사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다. 개신교신자인 황제에 의하여 로마 가톨릭 성당인 쾰른 대성당 내부에서 개신교 신자의 예배가 집행되었고, 당시 쾰른 대주교로 재직하던 파울루스 멜커스는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33] 축제에 참여한 수많은 쾰른 시민들은 환영식을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건축할 당시 설치되었던 임시 구조물의 철거는 1881년 상반기에 시작되어 1883년에 완료되었다. 완공 당시 성당 석재의 색은 밝은 하얀색이었다.

1856년의 쾰른 대성당 

1856년의 쾰른 대성당

1880년 성당 모습 

1880년 성당 모습

1900년 성당 모습 

1900년 성당 모습

제2차 세계 대전과 보수
 
1945년 4월 4일, 종전 직전

성당 건축을 위하여 사용된 석재들은 성질과 지어진 연도에 따라 풍화에 대한 저항력이 달랐다.[34] 특히 성당 건축에 가장 많이 사용된 조면암은 암석의 경도가 약했는데, 결국 1904년부터 사암의 붕괴를 막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04년부터 1939년까지 성당 건축 조합은 성당 내진의 버팀목을 교체하였다. 그 과정에서 1248년부터 132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내진 내부 벽면과 창틀이 발견되었다.[35]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성당은 70여 대의 폭격기가 사용한 소이탄으로 유발된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폭격으로 신랑을 비롯한 아치형 천장과 내부, 외부 석상들이 파괴되었다. 소위 쾰른 공습이라 불리는 이 폭격으로 북쪽 탑은 심각한 피해를 당하여 수십 년 동안 붕괴를 막는 보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심지어 1945년 6월에는 미군 부대의 소총 사격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다.[36] 전쟁 후 1946년부터 1997년까지 오토 도펠펠트의 주도로 고고학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1948년은 성당의 첫 구조물이 세워진 지 700년째 되는 해였다. 긴급 복원작업 끝에 1956년부터 성당은 다시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다.[37]

오늘날 성당은 산성비 탓인 암석의 부식과 매연으로 말미암은 변색 등 모든 환경오염 앞에 노출되어 있다. 성당 건축 조합은 성당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수십 년 동안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38]

종교의 관용
 
쾰른 대성당 건설 조합

1960년대 독일은 노동력의 확보를 위하여 이주 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많은 터키 이주 노동자들이 독일에 이민을 왔는데 당시 독일에는 무슬림이였던 그들을 위한 이슬람 예배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터키 이민노동법에 따라 쾰른 대성당은 북쪽 본당을 이슬람 예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특히 1965년 라마단의 마지막 날에는 400여 명의 이슬람 신도가 쾰른 대성당 내부에 양탄자를 깔고 라마단의 끝을 축하하는 기도를 하나님에게 하였다. 당시 본당 주임 신부는 언론을 통하여 쾰른 대성당에서 다른 종교인들이 예배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39]

세계 문화 유산

쾰른 대성당은 1996년 유네스코에 유럽의 고딕 건축 걸작으로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4년 7월 5일에는 "성당의 라인 강 건너편 지역(도이츠)에 대한 쾰른 시의 도시 계획으로 경관을 훼손할 가능성"이 제기되어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40] 2005년 7월 1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네스코 정례 회담에 따라 결국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에서 해제되었으며 유네스코의 독일 사무국은 2005년 말까지 도이츠지역의 녹지를 더 늘릴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도 그 지역에는 여전히 새로운 건축물 공사들이 계획되고 있었다.

2006년 7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30일간의 유네스코 국제위원회는 쾰른 대성당을 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하겠음을 시사하였다.[41] 결국, 시 당국에 의해 건설 계획은 대대적으로 변경되어 쾰른 대성당을 중심으로 엄격한 고도 제한을 시행함으로써 논란을 잠재웠다.

↑ 가 나 다 Domforum (2002년 4월). “쾰른 대성당 방문을 환영합니다.” Mai 2002판. Domforum.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9 Baptismal font behind cathedral Stefanie Lieb (Hrsg.): Stil und Form (Festschrift Binding), "Architekturdarstellungen in der ottonischen Buchmalerei: Der Alte Kölner Dom im Hillinus-Codex", Darmstadt 2001, S. 32-45 ↑ 가 나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13 Arnod Wolff, verbericht ueber die Ergebnisse der Koelner Domgrabung 1946-1983, Opladen 1983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17 Neuerscheinung. »Der Schrein der Heiligen Drei Könige« Archived 2007년 9월 4일 - 웨이백 머신, dombau-koeln.de, 2006년 8월 18일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31 Franz Mertens, Ueber den Dom zu Koeln und di franzoesische Bauschule in Deutschland, Koeln 1841. Ludger Honnefelder, Norbert Trippen, Arnold Wolff (1998), p. 17 Ludger Honnefelder, Norbert Trippen, Arnold Wolff (1998), p. 20 Arnold Wolff: „드라헨펠스의 조면암“ Archived 2010년 7월 6일 - 웨이백 머신, koelner-dom.de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32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33 ↑ 가 나 다 Ludger Honnefelder, Norbert Trippen, Arnold Wolff (1998), p. 185~p. 232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36~37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36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39 Koelhoffsche Chronik: Chron. d. deutschen Städte XIII, S. 176. Paul Clemen, Der Dom zu Köln. In: Kunstdenkmäler der Rheinprovinz, 6 III, S. 62–63. Harald Friese, Der Kölner Dom. 2003, S. 29, ISBN 3-89836-268-X. Dom-Kran Archived 2012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koelner-dom.de Wim Swaan, The Gothic Cathedral, Omega Books (1969), ISBN 0-907853-48-X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41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46~47 독일어: "Hier, wo der Grundstein liegt, dort mit jenen Türmen zugleich, sollen sich die schönsten Tore der ganzen Welt erheben."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44~47 Einen detaillierten Einblick gibt Carl Albert Sigismund Cuno: Notizen über den Betrieb die mechanischen Einrichtungen u. die Geschäftsführung beim Dombau in Coeln, ed. Holger Schmenk, in: Annalen des Historischen Vereins für den Niederrhein, Heft 211, Köln 2008, S. 269-306.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43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48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50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53 Arnold Wolff, Steine des Kölner Doms - ... Archived 2012년 3월 14일 - 웨이백 머신. Artikelserie im Kölner Domblatt, 1972 Interview mit Arnold Wolff im Kölner Stadtanzeiger vom 12. August 1998. Monate im Dunkeln, Dr. Heinrich Schneider, 1955 (Dissertation)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70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p. 73~87 DOMiT (Hrsg.): 40 Jahre Fremde Heimat. Materialsammlung Archived 2009년 9월 4일 - 웨이백 머신, 2000 (PDF-Datei; 2,54 MB); siehe auch: Aytac Eryilmac: (Red.), 40 Jahre Fremde Heimat: Einwanderung aus der Türkei in Köln, Begleitband zur Ausstellung 27. Oktober bis 23. November 2001 im Rathaus der Stadt Köln, Köln 2001, ISBN 3-9808030-0-7. 라인강 명물 쾰른대성당, 세계문화유산 제외되나, 세계일보, 2006년 7월 7일 UNESCO: Kölner Dom von der Roten Liste gestrichen Archived 2014년 8월 11일 - 웨이백 머신, Pressemitteilung der Deutschen UNESCO-Kommission vom 11. Juli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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