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제도

갈라파고스 제도(스페인어: Islas Galápagos 이슬라스 갈라파고스[*], 문화어: 갈라빠고스 제도, 공식 이름은 "콜론 제도"(Archipiélago de Colón 아르치피엘라고 콜론[*]))는 남아메리카로부터 서쪽으로 1,000 km 떨어진 적도 부근 태평양의 19개 화산섬과 주변 암초로 이뤄진 섬 무리이다. 에콰도르의 영토로 행정 구역상으로는 갈라파고스주에 속한다.

"갈라파고"는 옛 스페인어로 "안장"을 뜻하며,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발견되는 갈라파고스 땅거북의 등딱지 모양에서 유래했다.

여러 고유종으로 유명하며, 1835년 찰스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제도를 방문하여 진화론에 대한 기초 조사를 하였다.

플로세스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콜럼버스의 범선의 이름을 따서 산타마리아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3km2의 면적과 최고 높이 640m의 고지가 있다.

 노스시모어섬 갈라파고스 육지 이구아나 갈라파고스 바다 이구아나

갈라파고스 제도의 섬들은 현재 페르난디아섬에 위치한 핫스팟의 화산 활동에 의해 대대로 형성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갈라파고스 군도 일대에 위치한 판 중의 하나인 나스카판이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형성된 섬들도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남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차례로 새로운 섬을 형성되었다. 현존하는 섬 중 프리메라리(에스파뇰라섬으로 판단됨-일반인이 수정함) 섬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지금부터 300 ~ 500만년 전에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쪽 섬은 분화 활동이 활발하고, 동쪽으로 갈수록 화산 활동이 작다. 오래된 섬은 구성 암석이 오래된 침식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바다에 가라앉는 것도 있다고 생각된다.

갈라파고스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1535년, 파나마의 주교 프레이 토마스 드 베를랑가(Fray Thomas de Berlanga)였다.[1] 당시는 스페인이 남미를 정복하던 시기였는데, 스페인 국왕 찰스 5세의 통치기에 페루를 정복했다. 그리서 그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급히 사람을 파견을 했는데, 그가 바로 베를랑가이다. 그는 풍랑을 만나 이 섬에 물을 얻기 위해 닻을 내렸고, 바다사자, 이구아나, 거북이 등 이곳의 식생을 왕에게 제출할 리포트에 기록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원하는 물을 얻지는 못했다. 결국 페루 행을 포기하고 귀국을 한 후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의 보고서는 플랑드르의 지도 제작자,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에게 들어 갔는데, 그는 1574년에 출판된 《오비스 테라럼》(ORBIS TERRARUM) 지도에 그 섬을 넣었다. 이 섬들은 "Insulae de los Galapagos"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거북이 섬’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쓰여진 "갈라파고스"라는 이름이 오늘 날까지 쓰이게 된 것이다.[1]

1593년 영국인으로 이곳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리처드 호킨스였다. 19세기까지 갈라파고스 제도는 미대륙에서 스페인으로 황금이나 은을 운반해 가는 선박의 같은 화물을 노리는 영국 해적의 은신처로 이용되었고, 해적들 중에는 지도를 만들어 섬에 이름을 붙인 사람도 있었다. 해적들은 식량으로 삼기 위해 산양을 섬에 풀어 놓았다.

 1684년에 제작된 지도

1793년 제임스 콜넷은 갈라파고스의 식생을 설명하면서, 이곳을 태평양에서 고래를 잡는 포경선 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는 또한 최초의 이 섬의 항해지도를 작성했다. 그리하여 대항해 시대에는 포경선이 기름을 짜내기 위해 거북이를 약탈을 했고, 물이나 음식을 주지 않아도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신선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배에 싣고 다녔다. 그리하여 거북이 개체의 급격한 감소가 발생했고, 어떤 곳의 어떤 종은 멸종하기도 했다. 포경업자와 물개 모피 사냥꾼이 활동함에 따라서 이들의 개체는 거의 멸종 수준에 다다랐다.

1832년 2월 12일에 에콰도르가 영유권을 선언하면서, ‘에콰도르 군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과거에 있었던 이름에 새 이름이 붙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곳 최초의 지사는 호세 드 비야밀 장군(General José de Villamil)이었고, 플로레아나섬에 죄수를 데려와 정착시켰다. 또한 그해에 장인 몇몇과 농부도 합류를 시켰다.

1835년 9월 15일 로버트 피츠로이가 이끄는 탐사선 비글호를 타고, 찰스 다윈이 이곳을 방문했다. 이 배에는 지질학과 생물학을 연구하기 위해 채트햄(Charles), 앨비말(Albemarle)이 타고 있었으며, 세계 일주 탐사를 계속하기 위해 10월 20일 떠나기 전까지 제임스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의 흉내지빠귀(현재는 다윈의 핀치라고 부름)가 섬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고, 그 새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분류화하지 않았다.[2] 에콰도르 공화국의 갈라파고스 주지사를 역임하던 영국인 니콜라스 로슨은 형무소 식민지를 방문한 그들과 찰스섬에서 만났는데, 거북이가 섬마다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항해가 끝날 무렵, 다윈은 흉내지빠귀와 거북이의 분포를 생각하면서 불변하다고 생각되었던 "종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도 있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3]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새 표본을 분석하게 되었고, 서로 다른 많은 흉내지빠귀 종이 서로 다른 종의 되새류라는 것을 발견했고, 이 섬에만 유일한 종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진화를 설명하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유럽 정착민들이 이 섬에 도착을 했다. 에콰도르 법은 이들에게 20헥타아르의 땅을 제공했다.

이후 항공로의 횡단로가 건설되면 유럽을 중심으로 관광객이 방문하게 되고, 환경 파괴도 심각 해졌다. 지금은 다윈 연구소와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를 설치하고, 세계 유산에 등록하여 관광객에 대한 내추럴리스트 가이드 제도 등으로 엄격한 보호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손발을 씻지 않으면, 출입이 허가되지 않을 정도의 보호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정착해서 사는 염소와 최근에는 엘니뇨로 인한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는 바다 이구아나와 갈라파고스 육지 이구아나의 공존 관계가 무너져 바다 이구아나와 갈라파고스 육지 이구아나의 교미에 의해 태어난 새끼는 양쪽 모두의 DNA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갈라파고스 육지 이구아나에는 없는 발톱이 돋아난 하이브리드 이구아나라고 불리는 신종 이구아나가 출현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엘니뇨의 영향으로 몸길이가 25% 정도 짧은 이구아나가 발견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 가 나 A Travel Guide to the Galapagos Islands, Barry Boyce, Chapter II, p18 ↑ 가 나 Niles Eldredge (Spring 2006). "VQR - Confessions of a Darwinist". The Virginia Quarterly Review. pp. 32–53 Charles Darwin's zoology notes & specimen lists from H.M.S. Beagle., Keynes, Richard ed. 20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3 – August 1836,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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