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tà del Vaticano

( 바티칸 시국 )

바티칸 시국(라틴어: Status Civitatis Vaticanæ, 이탈리아어: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위요지 도시국가이다. 바티칸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총 면적은 0.44km2에 인구는 수백 명에 불과한 극소 국가로서 면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전세계의 주권 국가 중 가장 작다. 서울시 여의도 면적의 대략 6분의 1 정도로 서울시 보라매공원 크기와 비슷하다.

이전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했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 교황령의 회복을 목표로 한 1929년 2월 11일 라테라노 조약의 체결로 독립을 성취하여 오늘에 이른다.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 국가로,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이다. 바티칸 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는 성좌(Sancta Sedes)로 호칭된다.

바티칸 시World Heritage Logo global.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World Heritage Logo global.svg St Peter's Square, Vatican City - April 2007.jpg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영어명*Vatican(Holy see) and Rome프랑스어명*Cité du Vatican등록 구분문화유산기준Ⅰ, Ⅱ, Ⅳ, Ⅵ지정 역사1984년  (8차 정부간위원회)웹사이트바티칸 공식 사이트*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바티칸이 자리잡기 전에 이곳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로마 신화의 키벨레와 그 배우자 아티스를 숭배하던 곳이었으며, 점을 치는 언덕(ager vaticanus)이라 부르며 오랫동안 신성하게 여겨왔다. 그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곳에 거주민들의 통행과 정착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서기 1세기 초에 대 아그리피나(BC 14년 - AD 33년 10월 18일)는 바티칸 언덕과 그 주변에 물을 대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개인 정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칼리굴라(37년 - 41년)는 이곳에 거대한 원형경기장(Circus Gaii et Neronis)을 만들었고, 나중에 황제 네로 시대에 완공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 장식된 오벨리스크는 본래 칼리굴라가 원형경기장을 꾸미기 위해 서기 3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가져와 경기장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삼아 고대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초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은 다신교의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지어졌었다. 이러한 고대의 잔재들은 수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사를 할 때 빈번하게 발견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적인 발굴작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고, 5세기 초에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커져갔으며 19세기 중반 신흥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 동안 로마와 그 주변 지역들을 장악해 교황령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는 바티칸이 아닌 라테라노 궁전이었으며, 아비뇽 유수기(1309년 - 1377년)를 제외한 최근 세기 동안에는 퀴리날레 궁전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창궐하면서 교황청은 차츰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1870년에는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점령당하면서 교황의 소유지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 이러한 로마 문제라고 불리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티칸으로 대거 피신했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 및 기타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이탈리아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요구라며 항의했고 바티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교황령이 이탈리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이탈리아로부터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다. 이탈리아는 바티칸 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한 무력행사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을 포함하여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해갔다.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잃은 이후 스스로를 ‘바티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은 1929년 2월 12일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라테라노 조약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교황 비오 11세 양측으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에 의해 각각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가이며 교황청의 소유와 국제법상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티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탈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더불어 양측은 라테라노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폐기하였다. 라테라노 조약은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7년 이탈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다만 1984년 양측 합의로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정교 협약으로 수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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