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au Bali

( 발리섬 )

발리섬(인도네시아어: Bali)은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자와섬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구는 약 310만 명이다.

소순다 열도에 속한 섬으로 자와섬에서 북쪽으로 3.2 km 떨어져 있다. 길이 153 km, 폭 112 km 크기로 면적은 5,700 km2이다. 가장 높은 산은 섬 북동부에 위치한 3,148 m의 아궁산으로 1963년에도 분화한 적이 있는 활화산이다.

 
브사키 사원
 
울루와뚜 사원
선사 시대

기원전 2000년경에는 대만에서 기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교역을 통해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동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리 북(銅鼓)이 발견되는 등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명이 시작하고 있었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힌두교에 속하는 자바 사람들이 건너와 살게되었고, 힌두 자바 시대를 맞아 그 초기부터 자바 왕의 지배 하에 발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913년 무렵에, 드디어 스리 케사리 와르마데와(Sri Kesari Warmadewa)를 통해 자신의 와르마데와 왕조가 세워졌다고 한다.

자바 왕조(11~ 16세기)

11세기에 들어가면 발리의 왕조는 동 자바의 쿠디리 왕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게 된다. 스박크 등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전통적인 문화, 관습의 기원은 적어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얀간 티가 사원의 건립은 현재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 승려 쿠트란이 확장하였다. 1248년, 쿠디리 왕국을 멸망시킨 자바 신가사리 왕국의 쿠루타나가라 왕의 군대에 정복되어 복속을 당하였다. 8년 후, 바로 그 신가사리 왕조(Kerajaan Singhasari)는 새로운 마자파힛 왕조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다시 자유를 누리게 된다.

1342년, 발리는 마자파힛 왕국에 침입을 받아 400년 가까이 계속된 와르마데와 왕조는 종말을 맞는다. 마자파힛 왕국, 쿠디리 왕국의 후예 무프 크레스나 쿠파키산의 넷째 아들 스리 쿠트트 크레스나 쿠파키산을 보내 젤젤 왕국을 건설하게 했다. 그래서 발리는 마자파힛 왕국의 간접적인 지배 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마쟈파힛 왕국이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의해 쇠망하면서, 왕국의 신하들, 승려, 공예사들이 발리에 피난을 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에 의해서 고전 문학이나 그림자극, 음악이나 조각 등 힌두 자바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꽃 피었다. 또,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의 고승 ‘댄 할 니라르타’가 《타나 롯 사원》이나 《울루와뚜 사원》 등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는 등, 종교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군웅할거 시대(17~19세기)

그러나 젤젤 왕국의 황금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651년, 신하의 반란으로 인해 젤젤 왕이 클룽쿵(Klungkung, 현재 세마라프라)으로 천도하면서 실권은 각 지역에 거점을 둔 귀족가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각지의 귀족은 자신이 마자파힛 정복기의 정통 귀족(특히 힌두교 고승 와오라오)임을 자칭하면서, 클룽쿵 왕국은 다른 7개의 작은 나라(타바난 왕국, 바둔 왕국, 기아나루 왕국, 카란가스무 왕국, 반리 왕국, 문위 왕국)로 나뉘게 되었고, 발리는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게 된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유럽 세력의 진출이 시작되었지만, 별다른 특산품 없었던 발리는 식민지 통치의 관심지역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왕족 지배에 의한 자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참고로, 발리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은 1597년 네덜란드 상선 대원이었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발리 르네상스
 
가믈란

19세기 말이 되면서 당시의 불어닥친 제국주의 열풍의 유행 아래서 네덜란드가 발리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여, 각 지역의 왕가를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먼저 1846년 발리 쪽의 난파선을 끌어올린다는 요청을 빌미로, 발리 동북에 군대를 상륙시켜 부레렝(Buleleng)과 젬브라나(Jembrana)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침공을 진행하여,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고, 발리 전체를 식민지화 시켰다. 그러나 이때 발리 왕족, 귀족들이 보였주었던 ‘뿌뿌탄’(Puputan, 무저항 대량 자결)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전통 문화를 보전하는 정책을 내놓게 된다.

이 전통 문화 보호 정책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917년 발리섬 남부 지진 이후에 닥친 재앙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부상자는 1000명을 넘었고, 다음 해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독감이 발리에도 퍼졌으며, 1919년 발리 남부에 생쥐가 대량으로 발생해 곡물 수확량이 격감 하였다. 이런 역경을 두고 당시 발리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들에 대한 의례를 다하지 않았던 신들의 진노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론의 행진’과 ‘상향 드다리’(Sanghyang Dedari, 빙의 무용)가 성행하게 되고, 주술적인 의례, 놀이 활동이 발리에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현상을 네덜란드 사람들은 발리의 전통 문화로 이해하고, 재해 복구와 함께 보호를 진행한 것이다. 특히 부흥 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던 건축가 모엔은 발리의 진정한 전통 문화의 존재를 믿고, 지진 이전 발리가 중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러한 "실수"를 부흥의 과정에서 배제하려하였지만, 결국 그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위와 같은 네덜란드의 문화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반신 누드 부녀" 그림과 함께 서양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레고르 클라우제의 발리 사진 컬렉션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1924년 바타비아 - 싱아라자 간의 정기선 취항이 시작되었다). 1932년에 발리를 방문한 찰리 채플린은 "발리 행을 결정한 것은 형 시드니였다. 이 섬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미치고 있지 않고, 섬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자아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전의 관광객 수는 1920년대에는 연간 1,200 - 3,000명 정도였으나,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통계도 볼 수 있다.

 
예술의 마을 우붓

이렇게 서양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현재의 관광 중심이 된 음악 (가믈란 등), 무용 (레공, 께짝 등), 회화의 양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중심에 있던 것은 우붓의 영주였던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에 초대받은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Walter Spies)이다. 그의 집으로 멕시코의 화가 미겔 코바루비어스(Miguel Covarrubias)나 캐나다의 음악 연구가 콜린 맥피(Colin McPhee), 인류 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오스트리아 작가 비키이 바움(Vicki Baum) 등이 모였다. 그들은 대체로 "진정한 발리"를 지향하여 "발리의 발리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계급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각 지역의 왕족을 통한 간접 지배를 하였다. 관개 도로 등 농업 시설을 정리하고, 아편이나 커피 등의 상업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풍속을 개혁하여 나신을 금지시키는 등 유럽적인 근대화 정책도 실시했다. 또한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가 강조되는 반면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등 평민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줄어들어 "평등한 촌락 사회"라는 특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
 
독립영웅 구스티 응우라 라이

1942년 2월,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하였다. 네덜란드 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에 거의 피해없이 발리 해전에서 승리했고 불과 20일만에 네덜란드 군은 항복했다. 처음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반겼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와 다를 바가 없었고, 전쟁으로 인한 현지인들의 징발로 인해 불만이 증폭되었다. 그 당시 육군 장교였던 구스티 응우라 라이는 발리인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했다. 1944년 중반에 자바와 연계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독립을 용인하는 코이소 성명이 발표되었고, 1945년 4월 수카르노가 발리에 찾아와 인도네시아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다. 민족 단합의 기운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7월에 "소순다 건국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하자, 네덜란드는 빠르게 발리로 돌아왔다. 1945년 8월 17일, 자카르타에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순다 국가"로 발리에서는 친공화국 파에 의한 통치 체제의 확립이 기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구체제의 붕괴가 진행되지 않고, 1946년 3월 다시 네덜란드가 상륙을 하자, 친공화국 파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네덜란드가 상륙하자 격렬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절정에 달했던 1946년 11월 20일, 발리 서쪽 마루가에서, 구스티 응우라 라이 중령이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그가 이끌었던 게릴라 부대도 전멸했다(그러나 그 이름은 오늘날 발리 관문인 응우라라이 공항(덴파사르 국제공항 현지 정식 명칭)에 남게 되었다. 또한 이때는 본국에 귀국하지 못하고, 잔류하였던 일본군도 가세하였다. 이들 중에는 학도병으로 징병된 조선인 "양칠성"도 있었으며, 그는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의 가릇 영웅묘지에 독립영웅으로 안장되었다.[1]

이 게릴라전을 진압한 네덜란드는 1946년 12월 발리를 네덜란드가 직접 다스리는 "동인도네시아 국가"에 귀속, 자치령으로 선언하고 구체제를 이용한 네덜란드 의한 간접 통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공화국파와 친네덜란드파의 항쟁은 이어져 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 이양을 한 후 공화국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1950년 독립을 성취하였다. 결국 발리는 공화국으로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수카르노 시대의 발리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고,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치적인 대립이 지역 사회에까지 이르렀다. 1965년의 9월 30일 사건을 발단으로 공산당 토벌하였고, 일설에 의하면 발리에서만 10만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한다.[2]

수하르토 정권
 
우붓의 전통 무용수

수하르토의 개발 독재 시대에 들어가면서 발리는 간신히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의 세심한 배려의 하에 외화 획득을 목표로 하는 관광 개발이 시작되었고,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3년 일본에서 받은 전쟁배상금으로 사누르 발리 비치 호텔이 건설되었고, 1966년 개장을 하게 되었다. 1967년에 응우라 라이 공항이 개항하면 사누르가 발리에 매스 투어리즘의 첫 메카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누르와 꾸따는 비계획적인 개발이 진행되어 인프라 면에서도 큰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자카르타 중앙 정부는 새로운 누사두아 패키지 형식의 고급 리조트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오일 쇼크 등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고, 1983년에 불과 450개의 객실로 누사두아 해변이 개장되었다. 그런데 누사두아는 세계 유수의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선 리조트로 발전해 간다.

이렇게 발리의 관광 개발은 오랫동안 중앙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고, 관광 관련 세수의 대부분을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이 같은 중앙 정부 주도의 "만들어진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자신의 전통 가치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획일적인 이미지와 관광 마인드와 마주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교묘하게 단련해 간다.

1989년에 접어들어 발리 주정부는 독립적으로 관광 개발 마스터 플랜을 검토하였고, 가자마다 대학(Gadjah Mada University)에서 종합 관광 마을 형태의 개발이 제시되자 이것을 채용한다. 누사두아와 같은 대규모 개발과 정반대를 이룬 발리 마을의 일상적인 생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 마을"의 정비가 시작되어 현재의 뿐구리뿌란, 자티루이드 두 마을이 완성되었다.

지방자치

수하르토 정권 말기에는 중앙 주도의 대규모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아닷트에 뿌리를 둔 환경 보호 운동이 전개되었다.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 이후, 1999년 지방분권을 통해 지역 자치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가속시킨 것이 두 차례에 걸친 테러 사건이다. 발리는 유럽 선진국에서 부유한 백인 관광객이 모이는 동시에, 이교도인 힌두교 영역이었기 때문에 2001년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사건 이후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국제테러리즘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두 번의 대규모 무차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10월 12일 꾸따 지역에 있는 디스코 클럽을 겨냥한 자살 폭탄 테러로, 20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2005년 10월 1일에는 짐바란 지역과 꾸따 지역의 레스토랑을 겨냥한 동시 다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3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모두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두 번의 테러 사건으로 발리의 관광 산업은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2007년 사상 최고의 외국인 여행객수를 기록하는 등, 지금은 예전의 활기를 되찾고 있다. 그러나 한편 현지 사회에서는 자바에서 유입되는 무슬림 이민 노동자의 증가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SERIES/198/328455.html Hanna (1976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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